지난 2020년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이 92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한국 최초로 작품상과 감독상 등 4개의 오스카 트로피를 들어 올렸다. 이미 한국 최초로 칸 영화제에서 최고의 영예인 황금종려상을 받은 뒤라 아카데미 수상에도 국내 언론의 관심은 높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필자는 영화 <기생충> 관련 기사를 보다가 놀라운 사실을 알았다. 봉준호 감독이 모든 스태프와 배우들과 표준근로계약서를 작성하고 주 52시간을 지키면서 영화를 제작했다는 것이다. “아니 방송보다 험한 영화판에서 이게 말이 돼?” 이런 놀라운 변화가 편견에 사로잡혀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알고 보니 영화계는 주 52시간이 수년 전부터 자릴 잡아가는 모습이었다. 반면, 방송계는 여전히 스태프들의 열정을 땔감으로 밤낮을 가리지 않는다.

한국콘텐츠진흥원에 따르면 2021년도 방송 제작 인력의 1주일 평균 근로일수는 4.9일, 평균 근로시간은 43.9시간으로 나타났다. 장르별로 근로시간은 드라마가 47.3시간, 교양이 42.1시간, 예능이 43.2시간으로 조사됐다. 2019년 대비 1주일 평균 근로시간은 약 15시간(58.5시간)이나 줄었는데, 이는 2020년부터 시행된 근로시간 단축제도(주 52시간 상한) 덕분이라 하겠다. 그러나 방송사/OTT 비정규직의 경우 정규직의 절반 수준인 28.2%만이 근로시간 단축제도를 도입했다고 응답해 비정규직 비율이 높은 외주제작의 경우 평균 이상으로 노동시간이 많다고 예상할 수 있다. 특히 드라마 제작스태프의 경우 여전히 강도 높은 노동시간을 보이고 있다. ‘2020 드라마 스태프 노동실태 긴급 점검’ 조사 결과를 보면, 1일 평균 노동시간은 대다수(84.9%)가 14시간 이상 20시간 이내로 나타났다. 주 52시간 시행에도 불구하고 70시간에서 100시간에 해당하는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고 있는 것이다. 제때에 식사를 챙기기 어렵고, 장비 정리 시간이나 이동시간 조차 노동시간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경우도 부지기수다. 이 조사에 응답한 방송 드라마 제작 스태프들(330명)은 드라마 현장의 가장 큰 문제점을 장시간 노동(71.2%)로 꼽고 있었다.

장시간 노동. 분명 워라밸(Work-life balance)을 지향하는 시대에 해결해야 할 문제임은 틀림없다. 그럼 해결책은 무엇일까? 혹자는 탄력근무제 도입과 제작설비 확충, 개선을 위한 정부 지원 등을 얘기한다. 그러나 이보다 확실한 방법은 제작 기간을 넉넉히 갖고 사전제작 시스템을 정착시키는 것이다. 영국 BBC는 다큐멘터리의 경우 50분 물 2부작 정도가 1년에 제작하기에 적합하다고 한다. 국내는 어떤가? 다큐 PD가 1년에 50분 물 2부작만 제작한다면 정규직은 문제없겠지만 프리랜서나 비정규직 PD는 경제적 어려움에 처한다. 이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만약 방송사가 고통을 분담해서 제작비를 현실화하고 주 52시간 내에서 탄력근무제를 시행한다면, 스태프들의 삶의 만족도는 많이 높아질 것이다. 여기에 예능과 드라마에서 시즌제와 사전제작을 확립한다면 양질의 콘텐츠로 국내외 충성도 높은 소비자가 형성될 것이며, 제작사의 수입도 당연히 늘어날 것이다. 그러나 국내 드라마 제작 환경은 여전히 쪽 대본과 생방송을 방불케하는 촬영 일정에 배우와 스태프들은 어려움을 호소하고 있다. 드라마의 대세라고 할 수 있는 미니시리즈의 경우 주 2회 70분 편성이다. 드라마는 보통 1시간에 1분 분량을 촬영한다. 그럼 140분이면 1주일에 140시간을 촬영해야 한다는 것인데, 말 그대로 살인적인 스케줄이다. 사전제작 말고는 해결 방법이 없다. 과거 시청자의 구미에 맞게 대본을 수정해야 했다면 현재는 장르와 소재의 다양화, 디지털 기술의 보급, A급 작가나 PD 그리고 배우의 조합으로 얼마든지 소구력을 가질 수 있다. 이렇게 긴 시간을 갖고 잘 만들어진 작품은 K 콘텐츠로 전 세계에서 이미 각광받고 있으며, 원본뿐만 아니라 포맷 수출로도 이어지고 있다. 더 이상 망설일 필요가 없다.

필자는 오래전 제작 경험을 바탕으로 학생들에게 다음과 같이 얘기하곤 했다. “만드는 내가 즐거워야 보는 사람도 즐겁다.” 2016년 tvN의 고 이한빛 PD는 1일 20시간이 넘는 격무에 시달리고 방송 제작 환경의 불공정 관행에 괴로워하다가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그리고 5년여가 흐른 지금. 오늘도 여전히 카메라 뒤에 사람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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