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국 이슈’에 가려졌지만, 한일 무역분쟁은 현재진행형이다. 대한민국을 향한 일본의 ‘화이트 리스트(수출절차 간소화 대상국)’ 제외 방침으로 피해를 받는 업종 가운데 화학 분야가 가장 비중이 클 전망이다.

정부는 지난 8월 전체 일본 수출통제 가능 품목 가운데 10% 수준인 159개 품목을 집중적으로 관리한다는 방침을 정한 바 있다. 이 가운데 화학 분야는 40여 개로 가장 많다.

물론 정부가 보호하는 만큼 피해가 최소화될 수 있다고 분석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화학 분야가 한일 무역분쟁의 위협에 가장 크게 노출돼있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이는 일본에서 들여오는 소재를 제외하면 마땅히 대체물을 찾기 어려운 현실이라고도 볼 수 있다.

화학업계는 기초소재 및 ‘스페셜티 케미칼(기능성 화학제품)’ 등을 생산할 때 주로 일본산 원료를 사용한다. 현재 화학제품 가운데 일본 의존도가 높은 품목은 핵심 기초화학 원료인 톨루엔·자일렌 등이다. 지난해 일본 수입 비중은 톨루엔의 경우 79%, 자일렌은 97%에 달했다.

현대경제연구원에 따르면 화학공업 또는 연관공업 생산품의 지난해 대일(對日) 수입액은 5억4000만 달러로 전체 수입액의 98.4%에 달한다.

특히 일부 전기차 배터리용 소재는 일본산을 대체할 제품을 찾기 어려워 단기적 충격은 불가피하다는 전언이다.

에너지 전문 시장조사업체 SNE리서치에 따르면 배터리 셀을 감싸는 파우치, 양극재와 음극재를 접착시키는 고품질 바인더, 전해액 첨가제 등은 일본에 대한 의존도가 매우 높다.

알루미늄 파우치는 일본의 DNP와 쇼와덴코가 대표적인 생산 업체다. 세계 점유율 70%를 차지한다.

물론 국내에서도 율촌화학이 생산한다. 중국에서도 일부 업체들이 제조한다. 하지만 전기차 배터리용은 당분간 일본산의 대안이 없다는 전언이다.

고품질 바인더도 일본 의존도가 상당히 높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종구 국회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 위원장은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일본과의 무역분쟁을 진단하면서 “대한민국 소재부품 기업들이 일본에 의존하는 것은 이유가 있다. 이는 철저한 경제 논리에 따른 것이다. 첫째는 가격이 30% 정도 싸기 때문이다. 독일이나 스위스, 덴마크 등 유럽의 기술 강국들보다 더 싸다.”고 설명했다.

또 이 위원장은 두 번째 이유로 “지리적으로 가까워서 애프터서비스가 쉽다. 매국노라서 일본 제품을 쓰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한일 관계를 감정적으로 풀어가면 안 되는 것이다. 우리나라가 처한 여러 가지 경제적인 상황, 현실을 잘 조화해서 대처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일본이 한국전쟁을 통해 산업이 부흥해 밉게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현재로서 우리는 일본이 가진 장점을 받아들이고 단점은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 정치적으로는 얄밉지만, 경제적으로는 어쨌든 세계 최강 대열에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업황에 장사 없다’라는 본질을 지닌 화학 분야는 국내 화학사들이 나름대로 생존 전략을 탐구하고 있다. 업계 한 관계자는 “국제 정세가 도와주지 않고 일본과의 무역 마찰로 죽을 지경인데 국민에게 직접 다가가는 업종이 아닌지라 삼중고가 이만저만이 아니다”라고 귀띔했다.

롯데케미칼 대산 공장
롯데케미칼 대산 공장

◆ 롯데케미칼 “우리는 ‘한국 기업’”…일본 이미지 벗겨내기 진행 중

어쩌면 한일 무역분쟁에서 가장 큰 피해를 보는 기업은 롯데일지도 모른다. 롯데는 한국과 일본 양국에서 사업을 운영하기 때문에 ‘일본 기업’이라는 낙인이 찍혀 있다. 대표적으로 프로야구단도 한국의 롯데 자이언츠와 일본의 치바 롯데 마린즈를 같이 두고 있다.

롯데케미칼 관계자는 본지와의 대화에서 자사에 대해 “엄연히 한국에 적을 두고 있는 한국 기업”이라며 “롯데그룹이 지난해 정부에 내는 법인세가 1조5800억 원이고 고용 인원이 13만 명이라 ‘일본 기업’이라는 말을 넘어 ‘매국노’라는 비아냥을 들으면 서글프다”고 토로한 바 있다.

화학 분야는 신동빈 회장의 ‘뉴 롯데’ 프로젝트의 핵심 부문으로 자리매김한 바 있다. 신 회장 본인부터 대한민국에서 경력을 시작한 지점이 롯데케미칼의 전신인 호남석유화학이다. 신 회장이 롯데케미칼에 쏟는 정성이 지극하다는 후문이다.

신 회장의 국적을 살펴봐도 롯데케미칼이 일본에 종속된 기업이 아니라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시게미쓰 아키오(重光昭夫)라는 일본 이름을 갖고 있지만 신 회장의 국적은 대한민국이다. 대한민국과 일본의 이중국적을 유지하다가 1996년 일본 국적을 정리하고 대한민국 국적을 취득했다.

오히려 일본이 대(對)한국 수출규제가 석유화학 분야로 확대할 경우 롯데케미칼도 아로마틱 사업에 일부 영향을 받을 것이라는 분석도 나왔다.

롯데케미칼은 지난 2분기 실적 컨퍼런스콜에서 “일본의 무역 규제가 확대될 경우 아로마틱 부문이 일부 영향이 있을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고 밝힌 바 있다.

다만 “혼합자일렌(MX)의 일본 수입 비중이 22%인데 파라자일렌(PX) 가동률이 좋지 않아 물량을 구매하지 않더라도 PX 가동률을 조정할 수 있어 향후 영향이 없을 것”이라며 “일본에서 일부 첨가제를 구매하고 있지만 영향은 크지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고 덧붙였다.

LG화학 리튬 전기차배터리
LG화학 리튬 전기차배터리

◆ LG화학, 배터리 지키기 자존심 한 판

“업계에 모범이 돼야 할 기업들이 미국에서 법정 싸움이나 하고 있고… 그만 좀 싸우세요. 네? 알겠어요? 이게 바로 국제 망신 아닙니까?”

지난 2일 국회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 국정감사에서 백재현 의원(더불어민주당·경기 광명시갑)이 손옥동 LG화학 석유화학 사업본부장(사장)에게 질타한 말이다.

국회의원의 꾸지람을 감수할 상황이지만 LG화학에 있어 배터리사업은 결코 포기할 수 없는 분야다. 신학철 부회장이 지난 1월 취임한 이후 LG화학은 ‘다각화’를 본격화하며 업계 1위 자리를 사수하기 위한 행보를 진행하고 있다.

백 의원이 질타한 내용은 LG화학과 SK이노베이션이 미국에서 벌이고 있는 소송전이다. LG화학은 지난 4월 30일 미국 국제무역위원회(ITC)와 델라웨어주 지방법원에 SK이노베이션이 2017년부터 LG화학 전지사업본부 76명의 핵심인력을 빼가면서 관련 영업비밀이 유출됐다면서 ‘2차전지 영업비밀 침해’ 혐의로 제소한 바 있다.

미국 전기차 배터리 시장이 커지면서 LG화학은 미국 시장에 대한 투자를 확대하고 있다. 그 결과 한 외신 보도에 따르면 미국 제너럴모터스(GM)는 전미자동차노조와의 파업 협상 카드로 전기차 배터리 셀 공장 설립을 제시하면서 합작법인(JV) 대상업체로 LG화학과 중국의 CATL를 고려하고 있다.

이 경우 LG화학이 승리할 가능성이 크다. 미국-중국 무역 전쟁으로 중국 기업이 불리한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LG화학은 이미 미시간주에서 홀랜드 공장을 가동하고 있다. GM의 합작이 성사될 경우 미국에 두 번째 전기차 배터리 공장을 갖추며 성장하는 미국 전기차 배터리 시장을 선도할 위치에 설 수 있다.

한화케미칼 태양광 단지 전경
한화케미칼 태양광 단지 전경

◆ 한화, 전통의 기초화학 부문 外 신사업 태양광 통합

한화케미칼이 지분 100%를 보유한 자회사 한화큐셀앤드첨단소재를 합병을 결정했다. 이를 통해 석유화학과 소재, 태양광 사업이 한 조직으로 통합됐다.

통합 법인은 올해 말까지 모든 절차를 마친 후 내년 1월 1일 합병을 완료한다.

한화케미칼의 이 같은 결정은 사실상 태양광 사업을 전면에 내세우겠다는 의지로 풀이된다. 석유화학 산업의 다운사이클 진입과 급격한 대외 환경 변화 속에서 성장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것이라는 회사 측 설명이다.

태양광 사업이 회사의 대표로 부상하는 경우 시대적 흐름을 타고 한화케미칼이 업계 수위를 다투는 역량을 강화할 수도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의 장남인 김동관 한화큐셀앤드첨단소재 큐셀 부문 전무가 조만간 한화케미칼 부사장으로 영전할 것이라는 전망도 힘을 받고 있다.

원래 지난해 말 인사에서 김 전무의 승진이 점쳐졌으나 태양광 사업이 순손실을 내며 일반 유보됐다는 전언이다. 하지만 올해는 태양광 사업의 흐름이 좋다.

한화케미칼은 상반기 태양광 사업에서 연결기준으로 매출 2조6593억 원, 영업이익 816억 원을 냈다. 2018년 상반기와 비교해 매출은 63%, 영업이익은 166% 늘었다.

문재인 정부의 에너지전환정책에 따라 태양광이 국가 주요 에너지원으로 급부상하는 경우 김 전무의 승진과 함께 그룹 내 태양광 사업의 위상은 한층 강화될 것으로 보인다.

또 한화그룹은 최근 인사에서 한화케미칼 대표로 이구영 부사장을 임명했다. 이 부사장은 태양광 사업 전문가로 꼽히는 인물이다.

금호석유화학 합성고무 공장 전경
금호석유화학 합성고무 공장 전경

◆ 금호석유화학, 합성고무로 탄탄대로…화학사 불황 속 꿋꿋한 행보

화학 업계의 불황 속에서도 금호석유화학은 실적 호성적을 거두며 선방하고 있다. LG, 롯데, 한화 등 거대기업 틈바구니에서 금호석유화학이 선전하는 주된 요인은 합성고무와 페놀유도체다.

금호석유화학의 올해 2분기 연결기준 영업이익은 전년 같은 기간 대비 9.5% 감소한 1389억 원이다. 매출액은 10% 감소한 1조2971억 원, 순이익은 34.3% 줄어든 1152억 원을 각각 기록했다.

물론 달갑지 않은 결과다. 하지만 다른 기업과 비교하면 내림세가 적다. LG화학은 2분기 영업이익이 전년과 비교해 62% 감소하며 어닝쇼크를 맞이했다. 롯데케미칼도 50% 가까이 감소했다.

이로 인해 금호석유화학은 업계의 빅3 판도를 바꿀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일단 업계 3위인 한화케미칼을 제칠 가능성이 점쳐진다.

금호석유화학은 기초유분 가격하락에 힘입어 합성고무 사업에서 좋은 성적을 거뒀다. 기초유분 부타디엔 가격이 10% 떨어진 반면 SBR, NB라텍스, NBR 등 범용 합성고무 상품 판매량은 급증해 자연히 이익이 극대화됐다.

페놀유도체 사업은 주요제품의 스프레드 축소로 인해 수익성이 감소했다. 하지만 비스페놀에이(BPA)에 대한 중국의 수요가 늘면서 호성적에 일조했다. BPA는 휴대전화에 쓰이는 폴리카보네이트(PC)와 에폭시수지 등 고기능성 엔지니어링플라스틱(EP)의 중간 원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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