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민 라온위즈 대표(스피치디자이너/방송인)
김수민 라온위즈 대표(스피치디자이너/방송인)

나랏말싸미 듕귁에 달아 문짜와로 서로 사맛디 아니할세/이런 절차로 어린 백성이 니르고져 할 빼 있어도 마침내 제뜻을 시러 펴니 못할노미 하니라/내 이를 위하야 어엿삐여겨 새로 스물여덟짜를 맹그노니/사람마다 하여 날마다 쉬이니겨 날로 브쓰메 편하킈 하고져 할따라미니라

학교다닐 때 달달 외운 훈민정음(訓民正音) 서문이다. 훈민정음은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란 뜻으로, 세종 28년(1446)에 28자가 반포되었는데 말 그대로 글(한자)을 모르는 어리석은 백성들이 자신의 뜻을 잘 전달하지 못하는 것을 가엽게 여겨 세종대왕이 백성들로 하여금 쉽게 익혀 간편하게 사용하도록 만든 한민족의 글자다. 최고 권력자의 자리에서 기득권과 편안함을 누릴 수 있었던 한 나라의 왕이 안질이 걸릴 정도로 주야로 연구하며 백성들이 사용할 글자를 만들었다. 그는 못 배운 사람들이 겪는 불편함과 불이익, 서러움에 대해 공감할 수 능력을 지녔기 때문이다.

그런데 199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할 정도로 과학적이고 아름다운 이 우리말이 무분별한 외래어와 영혼 없는 신조어로 신음하고 있다. 내가 방송사에 근무하던 시절, 공개방송을 기획하다가 당시 청소년기에 있던 큰아들한테 초대가수로 OOO를 부르면 어떻겠느냐고 물은 적이 있었다. 그러자 ‘쩔지, 쩔어.!’라고 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게 좋다는 것인지, 싫다는 것인지, 말도 안된다는 것인지 도무지 그 뜻을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쩐다는게 무슨 뜻이냐고 물어봤더니 ‘멋지다. 흥분된다, 익사이팅하다’는 뜻이란다...웃음이 나왔지만 기가 막혔다.

우리는 다음 단어에서 몇개나 이해할 수 있을까? 커엽/영고/팬아저/갓띵작/취존/와우내/마상/아아/최애/할말하앟/사바사/oㅈ/비담/인고론 세젤예/시강.. 〈일요시사 발췌〉

요즈음 유행하는 신조어들을 보면 나만 바보인가라는 느낌이 든다고 하는데 정말 그렇다. 예를 들어 ‘패고’는 ‘패션고자’의 줄임말로 패션 감각이 떨어지는 사람을 의미한다. 고자는 남성의 성적 불능을 의미하는데 ‘초보’ 등의 의미로 쓰이고 있다. 또 거리마다 카페가 우후죽순 늘어나다보니 고객유치에 경쟁이 붙어 커피 한잔 시켜놓고 종일 책을 보거나 PC를 하는 사람들을 내쫓지 못하는 현상이 벌어지는데 이를 카공족, 즉 카페서 공부하는 사람들을 뜻한다고 한다. 대학생 뿐만 아니라 중장년층으로 확산되는 추세라고 하는데 은퇴자, 프리랜서, 디지털 노마드(nomad 유목민)도 늘어나고 있는 사회현상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요즘 10대들이 가장 혐오하는 것은 ‘나일리지’라고 하는데 나이와 마일리지의 합성어로, 나이가 많은 것을 앞세워 무조건 대우해 주기를 바라는 사람의 행동을 일컫는 말이라고. 나이를 먹으면 지갑은 열고 입은 닫아야 대우를 받는다고는 하지만 나도 나이를 먹어가는 입장에서 비판의 대상으로 전락하는 것 같아 좀 씁쓸하다.

‘관태기’라는 말도 있는데 ‘관계’와 ‘권태기’의 합성어로 지겨운 대인관계를 의미하고 ‘홧김비용’은 스트레스를 받아 홧김에 소비하는 비용을 가리키는 신조어다. 화를 풀기 위해 술값에 많은 지출을 한다거나 기분 전환을 위해 충동구매를 하는 일이 많이 때문이다. 또한 우는 소리를 합성한 의성어로 ‘고흐흑 바흐흑’이 있는데 음악의 아버지 바흐와 천재 화가 고흐의 이름 마지막 글자가 ‘흐’로 끝나는 것을 합성해 만든 말이다. 또 웃기는 상황에서 러시아 작곡가 차이코프스키의 이름 끝에 ‘키키’를 붙여 웃음소리를 흉내 냈는데 ‘차이코프스키키키키...’ 라고 표현한다. ‘참각막’은 방송에서 오디션 프로그램들이 많이 생기면서 팬들이 가수 지망생들을 분별하면서 유행시킨 말이다. 국적없는 신조어를 방송 자막으로 쓰는 예능프로그램들도 문제다.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쓰는 ‘쓸쓸비용’, 정규직 전환이 약속돼 있거나 인맥이 없으면 갈 수 없는 양질의 인턴자리를 ‘금턴’, 허드렛일이나 단순 노동만 반복하는 ‘흙턴’도 있다. 도로명에 무분별한 외래어를 쓰는 것도 문제다. ‘APEC로’ ‘머드로’ ‘크리스탈로’ ‘엘씨디로’ ‘에메랄드로’ ‘아카데미로’ ‘하모니로’ ‘컨벤시아대로’ 등 원칙 없는 외래어가 넘쳐난다.

내년은 세종대왕 즉위 6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이를 기념하는 행사가 서울시를 비롯해 세종대왕릉이 있는 여주, 세종시 등 전국 각지에서 준비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행사로 인기와 특수를 누리려는 일부 계층의 상술보다 선행되어야 할 것은 민족의 얼이 깃든 우리 고유의 말, 한글을 아름답게 가꾸고 한류의 중심에서 한글이 제대로 전해질 수 있도록 범국민적 관심사로 진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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