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최악 실적 오히려 새출발 계기 돼
4사 총합 6조 영업이익, 신사업 총알 확보
열분해유 탄소감축 인정, 수소·배터리 미래 핵심

충남 서산시 현대오일뱅크 대산공장 내 고순도 수소 정제 설비에서 수소 트레일러를 충전하고 있다.
충남 서산시 현대오일뱅크 대산공장 내 고순도 수소 정제 설비에서 수소 트레일러를 충전하고 있다.

[전기신문 윤병효 기자] 탄소중립은 석유산업의 종말일까. 지난해 중반까지만 해도 한국 석유산업의 분위기는 절망적이었다. 에너지전환과 코로나19가 겹친 상황에서 발생한 수요 급감은 석유산업에 사형선고를 내린 듯했다.

하지만 그리 호락호락 무너질 한국 석유산업이 아니었다. 기름 한 방울 나지 않는 척박한 야생에서 자란 탓에 생명력도 잡초처럼 질긴 한국 석유산업 아닌가.

코로나19 사태 완화로 석유 수요가 급증하면서 정유업계 실적은 역대 최고 수준으로 뛰어올랐고, 업계는 이를 바탕으로 차근차근 자원순환, 수소, 배터리 등 탄소중립 포트폴리오를 구축해 가고 있다.

◆2020년 최악의 실적, 오히려 약 됐다

증권업계에 따르면 지난해 12월 4째주 국내 석유업계 정제마진은 배럴당 6.4달러이다. 대략 업계의 평균 손익분기점이 3~4달러인 점을 감안하면 양호한 수준이라 할 수 있다.

정제마진은 원유를 정제해 생산되는 제품의 평균 판매가격에서 원료인 국제유가와 생산비를 뺀 마진을 뜻하는 것으로, 이를 통해 업계의 영업이익 수준을 가늠할 수 있다.

SK에너지, GS칼텍스, 에쓰오일, 현대오일뱅크 등 정유 4사는 코로나19가 한창이던 2020년 총합 5조원의 영업적자를 기록했지만 2021년에는 6조원 이상의 영업이익이 예상되고 있다. 그야말로 지옥과 천당을 오간 셈이다.

돌이켜보면 2020년의 코로나 환경이 마냥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일종의 백신이 된 셈이다. 정유업계는 석유산업이 더 이상 지속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뼈저리게 깨닫게 됐고 이후 탄소중립을 향한 그린포트폴리오 구축에 박차를 가하게 됐다.

SK에너지와 SK지오센트릭은 국내 최초로 폐플라스틱 열분해유를 정유 및 석유화학 공정에 투입했다.
SK에너지와 SK지오센트릭은 국내 최초로 폐플라스틱 열분해유를 정유 및 석유화학 공정에 투입했다.
◆폐플라스틱에서 원유 짜낸다…GS·SK·현대

환경부는 지난해 12월 30일 시행한 온실가스 배출권의 할당 및 인증에 관한 지침 개정과 올해 1월 1일 시행한 배출량 인증에 관한 지침 개정을 통해 폐플라스틱 열분해유 사용에 대해 온실가스 감축을 허용했다. 이에 따라 정유업계가 탄소중립 수단으로 강력하게 추진 중인 폐플라스틱 열분해유 사업이 경제성까지 얻어 더욱 탄력을 받게 될 것으로 보인다.

GS칼텍스는 지난달부터 폐플라스틱 열분해유를 석유정제공정에 투입하는 실증사업에 착수했다. 경쟁 업체가 열분해유를 원유정제설비(CDU)에 넣는 것과 달리 GS칼텍스는 약 50t을 여수공장 고도화시설에 투입했다. 이를 통해 플라스틱 원료인 프로필렌 등 고부가 제품을 더 생산할 수 있다.

GS칼텍스는 실증 결과를 활용해 2024년 가동을 목표로 연간 5만t 규모의 폐플라스틱 열분해유 생산설비 신설 투자를 모색할 예정이며, 추가로 100만t 규모까지 확장할 계획이다.

SK에너지는 지난해 9월 말부터 열분해유를 울산공장 정유∙석유화학 공정에 원료유로 투입했다. 열분해유는 SK지오센트릭(구 SK종합화학)으로부터 공급받았다.

이번에 도입한 열분해유는 SK지오센트릭과 SK이노베이션 환경과학기술원이 지난 2019년부터 후처리 관련 공동 연구를 진행해 온 국내 중소 열분해 업체 제주클린에너지의 생산 제품이다.

또한 SK지오센트릭은 지난해 초 미국 열분해 전문업체 브라이트마크와 사업협력 MOU를 체결하고, 울산에 대형 열분해 공장 등 화학적 재활용 방식의 도시유전을 건설할 계획이다. 2024년 상업 가동 예정이며, 연 20만t 규모의 폐플라스틱 처리가 가능하다.

현대오일뱅크는 지난해 11월부터 열분해유를 정제공정에 투입해 석유화학 중간원료인 나프타(Naphtha) 등을 생산하고 있다.

현대오일뱅크는 우선 100t의 열분해유를 정유공정에 투입해 실증 연구를 수행하고 안전성을 확보한 뒤 투입량을 점차 확대할 계획이다. 특히 국내 정유사 중 유일하게 열분해공정(DCU; Delayed Coking Unit) 기술을 갖고 있으며 이를 활용해 향후 연간 5만t 규모의 신규 열분해유 공장 설립도 검토 중이다.

현대오일뱅크는 폐플라스틱 열분해유로 생산한 나프타 제품에 대해 ISCC(International Sustainability and Carbon Certification)등 국제 인증기관에서 친환경 인증을 받고 ‘그린나프타’로 판매할 예정이다.

현행 법령 상 정제공정에 열분해유를 투입하는 것은 금지돼 있어 GS칼텍스, SK에너지, 현대오일뱅크는 지난해 9월 산업통상자원부로부터 해당 사업에 대한 규제샌드박스 허가를 받아 진행하고 있다.

◆수소는 본래 정유업계 영역…현대·에쓰오일

사실 수소는 정유업계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분야이다. 정제공정에서 부생수소가 생산되고 이를 다시 제품 생산공정에 투입하고 있다.

현대오일뱅크는 지난해 충남 대산공장 내에 고순도 수소 정제설비 구축을 완료했으며 수소연료전지 분리막 생산 설비도 구축해 시운전에 들어갔다. 고순도 수소 정제설비에서는 순도 99.999%의 수소연료전지 자동차용 수소를 하루 최대 3000kg을 생산할 수 있다. 이는 현대차 넥쏘 600대를 충전할 수 있는 양이다.

현대오일뱅크는 2030년까지 전국 180개 수소차 충전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한국남동발전과 수소연료전지발전 사업을 협력하기로 했다. 수소 생산 과정에서 발생하는 이산화탄소 전량은 탄산가스, 드라이아이스 등으로 재활용하는 블루수소 체계도 마련했다.

분리막은 전해질막의 강도를 좌우하는 뼈대로서 연료전지 시스템의 출력 향상과 내구성에 큰 영향을 미치는 소재이다. 올해 국내 자동차 제조사와 공동 실증을 거쳐 2023년 양산할 계획이다. 또한 올해부터 전해질막까지 사업을 확대하는 등 2030년 수소연료전지 분야에서만 연간 매출 5000억원, 영업이익 1000억원 이상을 창출할 계획이다. 장기적으로는 기체 확산층, 전극 분리판 등 자동차용 수소연료전지 전반을 포괄하는 단위셀 사업과 건물, 중장비용 연료전지 시스템 사업 진출도 검토한다.

에쓰오일은 대주주인 사우디 아람코와 협력해 사우디에서 생산한 블루 암모니아를 국내에 공급하는 등 수소의 생산부터 유통, 판매까지 수소 산업 전반의 사업 진출을 계획하고 있다.

이를 위해 삼성물산과 함께 국내 발전사에 청정수소와 암모니아 혼소(mixed firing) 연료를 공급할 예정이며 지난해 10월에는 청정수소 프로젝트 컨소시엄에도 참여했다. 또한 지난해 초에는 차세대 연료전지 벤처기업인 에프씨아이(FCI)의 지분 20%를 확보했다. 에프씨아이는 40여건의 고체산화물 연료전지(SOFC) 특허를 보유하고 있으며, 2027년까지 최대 1000억원 규모의 투자를 통해 100MW 이상 규모의 생산설비를 구축해 그린수소까지 생산할 계획이다.

◆탄소중립의 핵심 솔루션 배터리…SK

배터리는 미래 모빌리티의 동력원이자 신재생에너지의 간헐성을 해결해 줄 ESS 소스로서 탄소중립의 핵심 솔루션 역할을 맡고 있다.

SK이노베이션은 30여년간 배터리 사업에 지속적으로 투자해 최근 결실의 꽃을 피우고 있다. SNE리서치에 따르면 지난해 1~11월 글로벌 전기차 배터리 탑재량을 보면 SK온은 13.1GWh(점유율 5.7%)로 5위를 기록했다.

SK온은 충남 서산, 중국 창저우·옌청, 헝가리 코마롬·이반시, 미국 조지아·테네시·켄터키에 배터리셀 생산공장을 건설 중이거나 건설할 계획으로 이를 통해 현재 연 40GWh 생산능력을 2030년 500GWh로 확대할 계획이다.

또한 이와 연계해 폐배터리에서 금속을 채취하는 재활용(BMR; Battery Metal Recycle)과 배터리 잔여 수명을 예측해 재사용하는 등의 바스(BaaS; Battery as a Service) 사업도 추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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