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상직 당시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오른쪽 두 번째)이 제주스마트그리드실증사업단지에 조성된 종합홍보관을 둘러보고 있다. 당시 스마트그리드는 정부와 정치권의 높은 관심을 받았다.   제공:연합뉴스
윤상직 당시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오른쪽 두 번째)이 제주스마트그리드실증사업단지에 조성된 종합홍보관을 둘러보고 있다. 당시 스마트그리드는 정부와 정치권의 높은 관심을 받았다. 제공:연합뉴스

서울시와 광주광역시에 스마트그리드 사업모델을 실증하는 과제가 실시된다. 그동안 추락해 온 스마트그리드의 부활을 위한 신호탄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소비자가 체험하는 스마트그리드 체험단지’ 구축을 통해 미래형 전력 서비스 모델을 개발하는 이번 사업은 최근 수년간 전력산업의 이슈에서 밀려 있었던 스마트그리드를 활성화시킬 신호탄으로 주목받고 있다.

스마트그리드는 전력과 정보통신기술(ICT)를 융합해 한전이 일방적으로 수용가에 전기를 공급하던 기존 전력시장을 양방향으로 정보를 주고받으며 에너지 소비를 효율화한다는 개념으로 시작됐다.

제주스마트그리드 실증사업과 각지에서 조성된 스마트그리드 확산사업이 모두 실패로 끝나며 사실상 스마트그리드 사업은 동력을 잃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이번 과제는 스마트그리드 확산사업 이후 다시 한번 주어진 기회라는 게 업계의 중론이다.

체험단지 구축을 통해 미래 전력산업에서 스마트그리드의 역할과 활성화 방안을 새롭게 모색할 수 있게 됐다는 것.

◆구호는 요란했는데…실속은 없었던 스마트그리드 사업= 스마트그리드는 6~7년여 전까지만 하더라도 미래형 전력산업을 이끌 주역으로 평가받는 사업이었다. 정부의 녹색성장 정책을 이끌 중요한 키워드 중 하나였으며, 한국의 앞선 ICT 기술과 전력산업의 융합을 통해 막 태동하기 시작한 4차 산업혁명 시대를 대표하는 산업으로 성장할 것이라는 기대를 한 몸에 모았다.

반면 기대와 달리 스마트그리드 산업의 흐름은 그다지 순탄하지 않았다.

지난 2010년 제주도에서 실시된 스마트그리드 실증사업은 ‘이렇게 하면 안된다’라는 것을 업계에 온몸으로 체험하게 해 준 사업으로 인식됐다.

실증사업을 통해 다양한 전기요금제 도입, 요금 현실화 등의 요인이 없이는 소비자들의 변화를 이끌어 내지 못한다는 것을 배웠다. 아울러 기업 간 상호운용성을 통해 인터페이스를 맞춰야만 정부와 산업계가 꿈꾸는 지능형 전력망이 구축될 수 있다는 것도 실증사업에서 얻은 교훈이다.

철저하게 비즈니스모델을 만들어야만 새로운 시장에서 먹거리를 창출할 수 있다는 것을 배운 기업들은 저마다 새로운 기획을 내놓기 시작했다.

이 같은 결과 덕분에 실증사업은 실패지만 실패가 아닌 긍정적인 결과를 거둔 사업이라고 불릴 수 있었다.

지난 2013년 스마트그리드 확산사업이 공개됐다. 실증사업에서 얻은 교훈을 바탕으로 제대로 된 스마트그리드 만들기를 꿈꿔 온 업계의 기대가 한 곳으로 모였다.

제주스마트그리드 실증단지의 실패를 딛고, 시장 활성화는 물론, 저마다의 실전적인 비즈니스모델을 검증하기 위한 새로운 판이 마련된다는 기대감 덕분이었다.

그러나 확산사업이 예비타당성을 통과하지 못하면서 사업이 연기되기 시작했다.

당초 사업모델 도출을 위해 ▲지능형 전력망(Smart Power Grid) ▲지능형 소비자(Smart Consumer) ▲지능형 운송(Smart Transportation) ▲지능형 신재생(Smart Renewable) ▲지능형 전력서비스(Smart Electricity Service) 등 다양한 모델을 통해 상업형, 주거형, 관광형 등 지역 특색에 맞춘 다양한 스마트그리드 서비스를 제공하는 거점도시를 조성한다는 계획이었지만 이마저도 뜻대로 되지 않았다.

기획재정부가 예비타당성 검토 과정에서 에너지저장장치(ESS), 전기차 등 스마트그리드 서비스를 위한 핵심요소들을 모두 제외시킨 것. 그러다보니 ESS를 통한 효율적인 전기사용 환경 조성과 전기차를 통한 충방전 서비스(V2G) 등 비즈니스모델들이 시험도 해보지 못한 상황이 됐다.

우여곡절 끝에 시작한 스마트그리드 확산사업은 언론의 주목도 제대로 받지 못했다. 예산도 큰 폭으로 깎였을뿐더러, 사실상 손발이 모두 잘린 상황이라 원격검침인프라(AMI)나 에너지관리시스템(EMS) 등에 대한 보급사업 수준으로 전락해버렸다는 게 업계 관계자의 설명이다. 당초 기대했던 민간유발효과나 기술혁신 촉진효과 등은 사실상 검증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최근 스마트그리드는 사실상 명맥만 유지하고 있다는 게 업계 관계자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당시 스마트그리드라는 카테고리 아래에 있었던 ESS나 전기차, DR과 같은 개념은 이제 독립적인 산업으로 불리고 있다. ESS나 전기차 충전사업, DR 사업을 하기 위해서는 스마트그리드협회에 사업자로 등록을 해야하지만 스마트그리드와의 최근 연결점은 희미한 상황이다.

정부가 열심히 장밋빛 청사진을 보여주며 스마트그리드를 외쳤지만 남은 건 현재는 스마트그리드를 구성하던 산업들이 오히려 더 성장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요금 변화없는데 효율적 사용 웬 말…규제부터 해소해야= 전문가들은 스마트그리드가 성공하지 못한 가장 큰 이유로 여전히 정부가 틀어쥐고 있는 전기요금을 꼽는다.

한전이 해마다 막대한 적자를 지속하고 있는 상황에서도 저렴한 전기요금에 익숙해진 국민들의 눈치를 보는 상황이다. 최근 같은 상황에 전기요금을 현실화하자고 주장하는 사람이 나온다면 당장 욕부터 먹기 좋다는 얘기다.

그러다보니 스마트그리드를 통한 다양한 서비스는 기존 시장에 비벼볼 상황도 안됐다. 그냥 한전에서 제공하는 저렴한 전기를 풍족하게 사용하면 되지, 굳이 설비들을 설치해가며 불편하게 전기를 사용해야 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한전이 소매시장을 독점하는 환경도 문제였다. 스마트그리드를 통해 소비자가 곧 판매자가 될 수도 있는 상황을 만들려면 다양한 사업자들이 저마다 전력서비스 회사가 돼야 한다. 서로 다른 서비스 모델을 통해 소비자의 선택지를 높이고 수익모델도 만들어야 했지만 한전이 모든 것을 쥐고 있는 상황에서는 불가능한 그림이었다.

제주실증단지도, 스마트그리드 확산사업도 모두 이 같은 한계에 부딪혔다.

이 같은 이유에서 업계는 스마트그리드 체험도시에 다시 한 번 기대를 걸고 있다. 그동안 제도적인 한계에 부딪혀 시도조차 해볼 수 없었던 비즈니스모델을 실전에서 시험해볼 수 있는 기회가 마련됐기 때문이다.

이번 사업은 정부의 규제 샌드박스를 통해 실증특례를 받아 진행되는 사업이다.

소비자의 선택권을 확대하기 위한 지능형 전력 서비스와 신재생에너지 공유 공동체 서비스의 효과성과 경제적 타당성 등을 검증하기 위해 규제를 일부 완화해 적용한다.

이와 관련 지역 내 사업에 참가하는 아파트를 대상으로 다양한 선택형 전기요금제도가 도입되며, 태양광발전소와 ESS 이용자들은 상계거래 서비스를 통해 전기를 사고 파는 일도 가능해 진다.

옴니시스템과 SKT가 각각 컨소시엄 주관기관으로 참여해 서울시와 광주광역시 두 곳에서 시행된다.

과제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서울시와 광주시를 대상으로 아파트 내에서 사업자가 전기를 재판매하는 게 주요내용이다. 아파트는 한전이 가구별로 전기를 판매하는 게 아니라 통합 계량기로 단지마다 전기를 구매한다. 관리사무소에서 자체적으로 가구별 전기요금을 부과하기 때문에 한전의 영향을 받지 않고 다양한 요금제를 마련해 소비자들에게 선택지를 제공할 수 있게 된다.

해당 지역에서 태양광발전과 ESS 자가 소비자를 대상으로 잉여전력을 팔 수 있게 된다. 사실상 버려질 전기를 저렴하게 판매함으로써 누진제 구간에 걸리는 소비자들의 사용량을 낮춰 요금 절감이 가능해진다. 사업자는 이들 소비자들을 매칭시키는 등 다양한 컨설팅을 통해 수익을 올릴 수 있다.

전문가들은 최근 기후변화 대응과 에너지 사용 효율화를 목표로 신재생에너지는 물론 ESS, 전기차 등 다양한 설비들이 대거 보급되고 있는 기점에 발맞춰 스마트그리드 활성화를 위한 단초를 마련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이번 과제가 성공적으로 레퍼런스를 마련한다면 기 보급된 설비들을 바탕으로 금새 시장을 형성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다.

다만 일부 전문가들은 이번 사업이 과제 성격으로 진행되는 만큼 힘을 잃지 않고 끝까지 성과를 낼 수 있도록 진행돼야 한다는 조언도 건네고 있다. 기존 R&D 사업들이 그저 R&D로 끝나는 경우가 적지 않아서다.

업계 한 관계자는 “이번 사업은 예년에 비해 사업규모가 크지는 않지만 실질적으로는 스마트그리드 확산사업의 계승작이나 마찬가지”라며 “그동안 침체돼 있던 스마트그리드가 부활할 수 있는 신호탄 역할을 해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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