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은 플랫폼이다. 이집트가 제국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나일강 상류와 하류의 서로 다른 산물과 비교우위를 하나로 연결해 피라미드와 석조산업을 부양했던 나일강 플랫폼 덕분이었고, 아테네가 제국이었던 것은 그리스와 아나톨리아, 페니키아, 이집트를 모두 연결했던 에게해 플랫폼을 쥘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로마는 지중해 플랫폼을, 몽골은 실크로드 플랫폼을 가지고 나서야 문명 변경에서 벗어나 제국이 되었다. 문명사를 주름잡았던 다양한 제국은 모두 플랫폼이었고 그들이 어떻게 문명의 중심으로 진입해 성장했는지는 플랫폼 관점을 가지고 보아야 쉽게 이해가 된다. 또한, 플랫폼 관점으로 보면 문명사의 전환에 관련된 몇 가지 질문에 답할 수 있다. 그중 정화의 원정이 있다.

정화는 중국 명나라의 환관으로 본명은 마화(馬和)이다. 명나라 사람이지만 중앙아시아의 무슬림 출신이라 세계, 그리고 세계화를 제대로 이해하고 통찰할 수 있는 자질을 갖췄을 것이다. 실크로드의 서쪽 끝자락에서 보고 들었던 것이 공급자와 소비자를 연결하는 플랫폼이 어떤 이익을 줄 수 있는 지였고, 해서 명나라 영락제를 설득해서 남해 원정에 대한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정화의 해상 원정은 1405년에 시작해서 1433년까지 무려 29년 동안 7회에 걸쳐 지속한 대규모 벤처 사업이다. 첫 원정은 62척의 배와 2만 7800명의 부하를 거느리고 2년 동안 동남아시아의 자와 섬을 거쳐 수마트라 섬과 인도 남서쪽의 캘리컷과 실론까지 나아갔다. 실로 담대하고 영웅적인 기업가 정신이었다. 이렇게 29년 동안 원정한 거리가 18만 5,000km에 이르고, 동남아시아와 서남아시아, 인도와 동아프리카까지 무려 30여 나라였다.

이제 다시 보자면, 정화의 원정은 해상 교역로를 통해 공급자인 중국이 서양이라는 소비자를 직접 연결하고자 했던 플랫폼 시도였다. 당시 청화백자, 비단, 차, 향신료와 면직물 등 소위 ‘세계화된 상품’ 거래를 놓고 보자면, 중국과 동남아시아, 그리고 인도는 모두 같은 공급자였고, 서양 유럽만이 유일한 소비자였다.

정화는 소비자를 찾아 서쪽으로 갔다. 처음 도착한 동남아에서 정화는 어떤 기분이었을까? 아마 ‘망했군.’ 이런 기분이 아니었을까? 동남아는 중국 상품을 신기해하거나 비싸게 사는 곳이 아니었다. 조공을 받아봤자, 여전히 손해였을 것이다. 그래서 한 발 더 가야 했지만 인도에 도착해서는 더 우울했을 것이다. 인도도 공급자였으니까. 플랫폼 관점에서 말하자면 동남아시아, 인도, 아프리카는 모두 중국과 같은 공급자라서 이들을 만나봐야 이익이 없는 것이다.

지정학적 조건 때문에 정화의 원정은 성공하기까지 너무 오래 걸리고 멀리 가야만 하는, 소위 가성비가 매우 떨어지는 사업이다. 그러니 아프리카까지 가서 얻은 것이라곤 기린 하나에 불과했다.(오늘날 실패한 대부분의 신사업도 신기한 것 하나는 남긴다.) 정화 그리고 투자자 모두 쫄딱 망했던 것인데, 무려 29년을 믿음 하나로 지원했던 영락제야 말로, 당대의 엔젤이라 할 것이다. 아울러 명나라가 해양진출을 포기했던 것은 너무 부자라서가 아니다. 더 큰 부자, 더 높은 위치를 갈구하는 호모 사피엔스의 본성은 명나라 사람도 같았을 텐데, 돈이 벌렸다면 무엇을 마다했을까.

어쨌든 동쪽에서 정화가 망하고 20여년이 지난 1453년, 실크로드의 서쪽 끝인 콘스탄티노플을 오스만 제국이 점령한다. 1453년 함락이지만 이미 1390년부터 봉쇄와 공방이 이어지는 상태였으니, 실질적으로는 정화의 대원정이 시작될 때부터 육상 실크로드와 해상 무역로 모두가 오스만 제국에 의해 봉쇄된 상태였다.

이것이 정화와 달리 포르투갈에게는 행운으로 작동했다. 포르투갈에서 출발하는 항해사업자는 쉽게 수익을 낼 수 있었다. 지브롤터 해협, 좁은 곳이 불과 14km에 불과한 바다인데, 이를 건너면 오스만 제국에 의해 별리되었던 공급자, 아프리카를 직접 만나게 된다. 오스만 때문에 비싸진 상품을 아주 싸게 직구할 수 있게 되었다. 우선 금이 생겼고, 서아프리카 아래로 조금 더 나가니 다양한 상품을 직거래할 수 있었다. 희망봉을 돌면 인도와 동남아시아, 필리핀 그리고 중국과 일본의 상품을 직수입할 수 있었다. 한 발을 나가면 여러 칸 더 높은 부자가 될 수 있었고, 운이 좋으면 수익이 1000배에 이르렀다.

15세기 대항해 플랫폼은 유럽의 것이었다. 그들이 더 영웅적이거나 더 상업적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다만 서쪽에 사는 소비자였기 때문에. 중국과 달리 유럽은 서쪽에서 빠르게 수익을 만들 수 있었고, 순차적 확장으로 이익을 높이는 선순환 고리를 완성할 수 있었다. 그렇게 대항해 플랫폼의 유일한 소비자 유럽은 문명 중심이 될 수 있었다. 공급자인 정화는 바닷길을 통해 서쪽으로 갔기에 필연 망할 수밖에 없었고, 이는 오늘날 일대일로를 꿈꾸는 중화에게도 교훈이 될 것이다. 교훈? 공급자를 고집하려면 동쪽으로 가거나 실크로드로 가야한다. 서쪽 바다로 가서 성공하려면, 소비자가 되어야 한다. 가능하냐고? 작금의 중화로는 춘몽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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