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클 샌델은 하버드 대학의 철학 교수다. ‘정의(正義)’라는 늘 접하는 그러나 쉽게 답하기 어려운 질문을 우리에게 던지는 이 시대의 소크라테스이다. 그의 저서 ‘정의란 무엇인가’는 우리에게도 친숙하다. 매일의 일상에서 우리는 ‘나의 결정과 내가 사는 이 사회는 정의로운가’, 과연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마주한다. 오늘도 혼란스러운 뉴스의 홍수 속에 무엇이 정의인지 답하기는 쉽지 않다.

필자는 정의를 논하기에 턱없이 과문하다. 허나 짧은 생각에 동양에서는 정의를 선과 악, 옳고 그름, 도덕의 관점에서 보는게 아닌가 한다. 논어에 나오는 ‘군자는 의(義)로서 행한다’는 말에서 정의는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보인다. 도가(道家) 사상을 집약한 도덕경에서는 상선약수(上善若水)로 정의의 일단을 보여준다. 최고의 선은 무색, 무취의 물과 같고 ‘사람사는 세상’도 그와 같아야 한다고 말한다.

샌델은 정의라는 화두로 서양철학을 들려준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정의란 자격있는 자가 마땅한 몫을 갖는 것이다. 최고의 악기는 최고의 연주자에게 주어져야 정의로운 사회인 것이다. 돈이 많다고 좋은 것을 가지는 것은 정의롭지 않다는 것이다. 여기서 누가 적격이고 무엇이 최상인지는 답변이 필요하다. 공리주의는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으로 이에 답한다. 공리주의는 사회적 합의를 이루는 근간으로 종종 이용된다. 다수의 이익을 위한 개인의 희생은 정당하다는 주장이다. 다수를 위해 개인의 희생을 강요하는 것을 정의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래서 개인의 자유 의사에 따른 사회적 합의를 중시하는 자유주의가 등장한다. 자유로운 합의를 했다고 정의로운 사회가 될 것인가. 자유로운 선택이 사실은 착각에 의한 것일 수도 있고, 개인의 선택이라고 무한정 허용할 수는 없다. 자유주의에 대한 보완으로 정의로운 사회적 합의를 제시한 이는 칸트이다.

칸트는 이성(理性)에 따른 집단적 동의라는 가상의 사회적 합의를 정의라고 보았다. 이성에 따른 가상적 합의가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는 지는 2세기 후에 미국의 철학자 롤즈가 설명한다. 롤즈는 우리 모두가 내가 누구인지를 잊고 원초적으로 평등한 위치에서 합의한 선택을 정의라고 한다. 만약에 내가 노예인지 자유인인지를 모르고 사회계약을 맺는다면 노예제를 선택하지 않을 것이고, 따라서 노예제는 정의롭지 않다는 것이다. 샌델은 여기에 공동체 개념을 더해서 보편적 가치에 기반한 공동체의 합의를 정의라고 제시한다. 보편적 가치는 롤즈와 칸트가 주창한 이성적 선택이다. 샌델은 우리가 역사, 환경, 문화를 공유함으로서 생성되는 공동체 의식이 사회적 합의, 즉 정의에 영향을 준다고 보았다.

샌델 교수의 2012년 내한 강연에는 무려 1만5000명이 모였다. 그 자신도 놀랄 정도의 관심은 그만큼 우리 사회가 정의라는 가치에 목마르고 있다는 뜻일 것이다. 동양의 정의가 선악의 문제라면 서양의 정의는 합의의 문제이다. 동양의 정의가 옳고 그른 판단의 가치를 찾는다면 서양의 정의는 합의의 원칙을 찾는다. 합의는 각자의 선택을 바탕으로 한다. 정의로운 선택은 쉽지 않다. 오죽하면 예수님도 무엇이 정의인지 “하느님 뜻대로 하옵소서”하고 하느님께 의탁하지 않았는가. 노무현 대통령의 ‘사람 사는 세상’도 결국 정의의 문제이다.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하며 결과는 정의로울 것이다’라는 문재인 대통령의 취임사가 감동적이면서도 공허하게 느껴지는 것은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우리 사회가 아직도 답을 찾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마이클 샌델에게 정의는 공동체의 합의된 원칙이다. 합의는 이성에 따른 선택이어야 한다. 이성은 칸트의 말을 빌리자면 일체의 감정이 개입하지 않은 상태를 말한다. 원자력이 ‘안전의 적’인 ‘악한 에너지’라고 제기한 탈원전은 과연 정의로울까. 그가 탈원전에 답한다. “이성은 과학에 묻고, 감정은 편견에 묻습니다. 이성이 마비된 선택은 정의로울 수 없습니다. 에너지 정의는 선악의 문제가 아니고 공동체에 맞는 조화로운 구성을 합의하는 문제입니다”.

정동욱 중앙대 에너지시스템공학부 교수

저작권자 © 전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