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강기공사 무늬만 공동수급..‘위험의 외주화’ 여전히 'ING'

서울의 한 건설현장에서 작업자가 승강기를 설치하고 있다. (사진은 기사의 특정 사실과 관련이 없음)
서울의 한 건설현장에서 작업자가 승강기를 설치하고 있다. (사진은 기사의 특정 사실과 관련이 없음)

지난 3월 27일 부산 해운대구의 한 아파트 17층에서 승강기를 교체하던 설치공사업자 2명이 승강기와 함께 1층으로 추락했다. 이 사고로 A(34)씨 등 작업자 2명이 현장에서 숨졌다.

경찰에 따르면 당시 작업자가 안전장치를 제대로 착용하지 않는 등 전반적인 안전관리가 부실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하지만 사고책임을 두고 ‘위험의 외주화’ 논란이 일었다. 경찰 수사결과 사실상 대기업인 원청업체의 지시 아래 작업이 이뤄졌지만, 책임은 하청업체만 지는 형태로 계약이 맺어졌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우리나라 승강기공사의 민낯이 드러났다.

당시 사고현장의 승강기 교체작업은 국내 메이저 제조사인 T사가 단독으로 수주했다. T사는 D사와 함께 ‘공동 수급’ 형태의 계약을 맺고 공사에 나섰다. T사는 공사에 필요한 물품을 조달하고 실제 작업은 D사가 진행하는 형태다. 추락사고가 나자 T사는 ‘공동 수급’ 계약을 이유로 교체공사 중에 발생한 사고에 대한 책임은 D사에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경찰의 수사결과 T사는 SNS로 D사 직원에게 작업 지시를 하는 등 사실상 ‘하도급 계약’ 형태로 공사를 진행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 과정에서 불법하도급 정황도 포착됐다.

◆‘위험의 외주화’ 관행처럼 굳어져…불법하도급 면피용으로 ‘공동수급’ 계약 동원

승강기 분야에서 이 같은 ‘위험의 외주화’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관련 업계에 따르면 설치공사를 다른 업체에 맡기는 ‘외주공정’은 1970년대부터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이전에는 국내 승강기 수요가 많지 않아 대부분의 메이저 제조사(대기업)들은 자체 설치팀을 꾸려 공사를 해왔다.

하지만 고층빌딩과 아파트 공급이 급격하게 증가하면서 설치수요가 늘자 더 많은 인력이 필요해졌다. 인건비 상승이 부담으로 작용하자 대기업들은 비용절감과 효율성 향상을 위해 설치분업화에 나섰다. 협력사를 선정해 위험한 설치공사를 맡기는 방식이다. 대기업으로서는 사고위험을 회피함으로써 혹시 모를 비용지출을 줄일 수 있게 되고, 이는 장기적으로 기업경영에 있어 플러스효과를 가져온다는 셈법이 작동한 것으로 풀이된다.

특히 지금처럼 불법하도급 제도가 확고하게 자리 잡기 전에는 설치공사업 면허를 보유한 대기업이 건설사나 발주처로부터 승강기공사를 수주한 뒤 동일업종인 설치공사만 따로 재하도급을 주는 게 가능했다. 하지만 건설산업기본법에 동일업종에 대한 재하도급 금지규정이 신설되자 대기업들은 이를 교묘하게 피하기 위해 공동수급 계약을 동원했다. 공동으로 승강기공사를 진행하되 설치는 중소협력사가, 공사에 필요한 물품 제공과 품질보증은 대기업이 맡는 방식이다.

이 경우 현행 법률상 대기업과 설치업자는 대등한 파트너로서 서로의 경영에 간섭할 수 없다. 계약당사자는 대등한 입장에서 합의에 따라 공정하게 계약을 체결해야 하고, 계약내용도 서로 공유해야 한다. 설치공사 대금 역시 대기업이 지급해선 안 된다. 그러나 실제로는 무늬만 공동수급이지 이면을 들여다보면 사실상 하도급 계약형태를 띠고 있다. 동일업종에 대한 불법하도급 문제가 불거질 수 있는 이유다. 물론 동일업종에 대한 하도급이 불가피할 경우 상황에 따라 공공기관 등 발주처의 동의를 얻어 공사를 진행할 수 있는 예외규정이 있지만 민간 분야에선 거의 지켜지지 않고 있다는 게 설치업계의 설명이다. 무늬만 ‘공동’이지 실제로는 위험한 업무와 책임을 중소업체에 떠넘기는 이른바 ‘위험의 외주화’와 다를 바 없다는 지적이다.

이 같은 위험의 외주화는 승강기 설치나 교체공사 중에 사고가 발생할 경우 대기업의 책임회피에도 유용하다. 표면적으로 공동 수급 계약이기 때문에 모든 책임은 설치업체가 떠안게 되는 구조다. 하지만 이번 부산 사고에서 보듯이 사실상의 하도급계약처럼 대기업의 업무지시와 대금지급 등은 관행처럼 굳어져 있다.

특히 T사는 1년 전부터 설치협력사들에 현장별로 승강기 설치공정 진척도 등을 모바일로 작성하라고 지시한 것으로 파악됐다. 최근에는 H사도 설치협력사의 소속근로자에게 직접 ‘모바일 작업일보’를 작성토록 요구한 것으로 확인됐다. 이는 대기업-설치업체 간 불법하도급 관계를 인정하는 꼴이며 명백한 공정거래법 위반이라는 게 설치업계의 주장이다.

◆대기업들 설치업체로부터 사용인감 제출받아 계약서 작성…사실상 불법하도급

이번 부산 사고에서 해운대경찰서는 T사 서울 본사와 경남지역본부를 압수수색해 여러 하청업체의 법인 도장, 고무인 등을 확보하기도 했다. 대기업과 설치업체간 불법하도급 관계가 의심되는 정황증거이다.

업계에 따르면 설치공사업체들은 대기업 협력사로 등록할 때 계약효력이 발생하는 사용인감도장과 상호가 각인된 고무인을 제출하도록 강요받는다. 이렇게 제출된 인감도장은 설치업체 모르게 발주처와의 공동수급 계약서 작성에 활용된다.

한 설치업체 대표는 “승강기 공사건별로 발주처, 대기업, 설치업자 등 3자가 모여 계약을 체결하기 어렵기 때문에 대기업은 편의상 사용인감도장과 고무인을 요구한다”며 “이를 거절하면 협력사 등록이 거부되거나 일감을 따낼 수 없는 게 현실”이라고 설명했다.

이 과정에서 설치업체는 정확한 공사금액이나 계약내용을 알 수 없고, 일방적으로 계약을 이행하도록 요구받는다는 게 관련 업계의 공통된 목소리다.

O사의 경우 공사대금과 현장, 계약당사자 및 기간, 제품모델 등 구체적인 계약내용을 공란으로 비워둔 채 공동수급 계약서를 수백 장 만들어 설치업체에 배포한 뒤 미리 인감도장을 찍게 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본지가 한 설치공사업체로부터 입수한 승강기제조·판매·설치계약서에도 이러한 내용이 비워져 있었다. 여기에는 계약당사자로 대기업 O사가 명시돼 있고, 갑과 병의 상호명은 빈칸으로 돼 있다. 설치업체는 병으로 표시된 빈칸에 인감도장을 찍어 대기업에 보낸다. 이후 발주처인 건설사 등과 계약할 때 이 계약서가 그대로 사용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설치업체의 요구사항이나 항변이 원천적으로 봉쇄된 불공정계약이 될 수밖에 없는 구조다.

이처럼 발주처와 대기업, 중소 설치공사업체 등 3자가 체결하는 ‘승강기 공동 수급’ 계약 이면에는 불법하도급과 더불어 사실상 하청업체에 무리한 요구를 강요하는 ‘대기업 횡포’가 숨어 있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높다. 건설사도 이러한 사실상의 불법하도급 행태를 묵인하거나 오히려 이를 악용해 승강기 공사기간을 무리하게 짧게 잡아, 부실 공사와 안전사고의 위험을 높인다는 게 설치업체들의 주장이다.

또 다른 설치업체 대표는 “대부분의 건설사는 이러한 무늬만 공동 수급 계약을 알고도 묵인하고 있고, 비용절감을 위해 승강기 설치공사기간을 단축하길 원하다”며 “메이저 승강기 제조사는 건설사(발주처)의 요구를 무시할 수 없어 설치업자에게 무리한 공기(工期) 단축을 지시한다”고 말했다.

이어 “이는 건설사-메이저 제조사-설치업자로 이어지는 이른바 ‘갑-을-병’ 관계가 고착화되면서 불거진 측면이 크고, 건설사의 무리한 승강기 설치기간 단축요구는 부실시공을 유발해 안전을 위협하게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저작권자 © 전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