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 결과는 또 애매하게 나오겠죠. 가해자를 특정할 수 없게. 주요 원인은 없고 모든 것이 조금씩 잘못 됐다는 식으로.”

지난 3월 민관합동 ESS 화재사고 원인조사 위원회(조사위)는 한국화학융합시험연구원(KTR) 과천청사에서 ESS 화재 유관 기업들과 비공개 간담회를 가졌다. 조사위는 ESS 화재 원인을 네 가지로 분류했고, 실증시험을 거쳐 5월 쯤 화재 원인 조사 결과를 발표하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간담회를 마친 후 ESS 업계의 기대는 크지 않았다. 실증시험을 거친다 해도 산업을 살린다는 명목 하에 ‘맹탕 조사 결과’가 나올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11일 발표된 조사위의 ESS 화재원인 결과 발표는 예상을 빗나가지 않았다. 조사위는 ESS 화재 원인을 ▲전기적 충격에 대한 배터리 보호시스템 미흡 ▲운영환경 관리 미흡 ▲설치 부주의 ▲ESS 통합제어·보호체계 미흡 등 4가지 요인으로 결론지었다. 외부 전기적 요인, 설치, 운영 미흡, BMS 미흡, 통합제어 미흡 등 총체적으로 문제가 있었다는 것이다.

3월에 업계와 비공개로 공유했던 원인 중 하나였던 배터리 설계 미흡은 빠졌다. 특정 제조사의 일부 배터리 셀에서 제조 결함이 발견됐다고 발표는 했지만, 180회 충방전 시험을 진행했을 때는 화재와 연관 지을 수 있는 내부 단락은 일어나지 않았다고 선 그었다. 결과적으로만 보면 배터리자체를 제외한 모든 부분이 문제가 있다고 결론을 낸 셈이다.

하지만 실증에 참여했던 일부 관계자들은 비보도를 전제로 배터리에도 미흡한 부분이 있을 수 있음을 이야기 하고 있다. 특정 제조사의 배터리 중 일부는 품질 관리가 안 돼 있었다는 등 많은 이야기가 오갔다. 관계자들은 화재 원인을 명확하게 밝히고 이에 따라 ESS 시스템과 배터리·PCS 같은 구성 요소가 더 안전해야 함에는 동의한다. 하지만 종국에는 “그래도 산업을 살려야 하지 않겠느냐”며 공통적으로 말끝을 흐렸다.

정부는 결국 쉬운 길을 택했다. 명확히 가해자를 특정하지 않았고 미래 먹거리라 불리는 배터리 산업의 리스크 또한 해소해 줬다. 이제 모두가 안전을 위해 노력한다면 ESS 산업 생태계는 살아날 수 있을 것이고 정부도 이를 위한 지원책을 펼치겠다고도 말했다. 하지만 명확한 현실·문제 인식에 발딛지 않고 외치는 미래는 공허할 뿐이다. 쉬운 길을 택한 정부에 아쉬움이 남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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