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종교작가 존 버니언의 소설 ‘천로역정’ 속 지옥의 모습은 우리의 통념을 뒤집는다. 끓어오르는 불길도, 무서운 심판자도, 굶주림도 없다. 도처에 꿀이 흐르고 풍요로운 모습이다. 다만 지옥에 간 죄수들은 2미터가 넘는 젓가락으로 산해진미를 먹어야 하는 형벌에 처한다. 실상 먹을 수 없는 것이다. 지옥은 장소가 아니라 상태라는 말과도 일맥상통한다.

국내 ESS 시장도 지옥을 경험중이다. 2017년을 시작으로 이달까지 총 스물두 건의 화재가 발생했고 정부의 가동중지 권고로 산업 자체가 멈춰있는 상태다. 이전 정권에서 대용량의 전기를 저장할 수 있다는 신기술에 호기롭게 보급 사업을 시작했지만 지금은 담당부서의 애물단지로 전락했다. 업계는 6월 초에 발표될 정부의 조사결과와 보상안만 바라보며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기다리고 있다.

ESS도 불이 날 수 있다는 전제에서 출발해야 한다. 우리가 기술력이 열악해서 화재가 발생한 것이 아니다. PCS와 배터리 업체들은 세계 시장을 선도하는 수준이고, 시공 대기업들도 마찬가지다. 제조사들도 시공업체들도 어떻게 하면 더 안전한 시스템을 구성할 수 있는지에 대해 함께 머리를 맞대고 중지를 모아야 한다. 각각의 부품들을 더 안전하게 만드는 것과 함께 ESS를 시스템으로 이해하고 바라보는 것도 병행돼야 한다. 어떻게 ESS 생태계를 지켜낼 수 있는지 미래지향적인 시각을 견지해야 산업에 다시 숨결을 불어넣을 수 있을 것이다. 화재 원인이 명확히 밝혀져야 하겠지만 현 사태의 문제를 한 기업의 탓으로 몰아가는 것은 소모적인 일일 뿐이다.

‘천로역정’에서는 천국의 모습 또한 상세히 묘사돼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지옥과 모습이 같다. 2미터의 젓가락으로 밥을 먹어야 하는 것까지 말이다. 차이점은 서로가 서로를 도와준다는 것이다. ESS 민관합동조사 위원회의 조사가 마무리 단계에 있다. 업계가 이제 네 탓 공방을 끝내고 서로 협업해 더 안전한 ESS 생태계 구축에 힘쓴다면 지옥은 언제든 천국으로 변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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