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대 에너지시스템공학부 정동욱 교수
중앙대 에너지시스템공학부 정동욱 교수

영화의 묘미는 일상에서 경험할 수 없는 것을 경험하게 해주는 것이다. 우리는 영화 속에서 잃어버린 꿈을 보고, 행복을 찾고, 마치 주인공이 된 마냥 잠시나마 일상을 잊는다. 필자는 특히 재난 영화를 좋아한다. 재난 영화는 현실을 초월하는 천재지변과 극적인 상황으로 관객의 숨을 죽인다. 그리고 인간의 군상을 보여준다. 나약하지만 착한 사람들, 얄밉지만 미워할 수 없는 사람들, 자신을 위하여 다른 이들의 희생은 아랑곳 하지 않는 사람들, 훌륭해 보이고, 잘난 척하는 자들과 그들의 비루함을 보여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재난 영화의 가치는 휴머니즘에 있다. 곤경에 처한 사람들을 위해 자기를 희생하는 이웃들,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 죽음을 택하는 사람들, 이들이 마침내 악인을 벌하고 정의롭고 인간미 넘치는 영웅에 의해 재난은 마무리된다. 이런 영웅의 모습에 내가 곧 그인 것처럼 잠시나마 짜릿한 현실 도피를 경험한다.

영화 ‘판도라’는 이런 재난 영화의 하나이다. 대통령이 ‘판도라’를 보고 탈원전을 선언하게 되었다는 얘기는 너무나 회자되어 이제 정설이 되었다. 재난 영화는 재난 영화일 뿐이다, ‘판도라’는 위기에 처해 우왕좌왕하는 무책임한 책임자를 그렸다. ‘판도라’는 위기를 자기의 권력에 이용하려는 자들과 맞서 정도를 추구하는 지도자를 그렸다. 사고를 막고 가족을 구하기 위한 평범한 영웅을 그렸다. 영웅을 그리기 위해 원전을 위기의 대상으로 삼았을 뿐이다, 재난 영화의 특성이듯, 과장된 재난을 그리기 위해 원전 폭발을 영상화 했을 뿐이다. 이를 보고 모든 원전은 폭발한다고 생각한다면, 영화를 보고 나도 영화 속의 주인공처럼 지치지 않고 뛸 수 있고, 수 톤의 콘크리트 더미를 들어 올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다. 모든 재난 영화가 그렇듯, ‘판도라’에서 봐야 되는 것은 휴머니즘과 진실은 사악한 무리를 이긴다는 것이다.

필자가 본 우리나라 재난 영화의 백미는 ‘해운대’다. 화면을 꽉채우는 수십층 높이의 쓰나미가 해운대를 덮친다, 후쿠시마는 물론, 2004년 12월26일 역대 최대의 희생자를 냈던 남아시아 일대를 초토화시킨 쓰나미를 압도한다. 그러나 그 누구도 해운대에 쓰나미를 막는 방벽을 세워야 한다고 얘기하지 않는다. 우리는 영화 속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위하여, 가족을 위하여 목숨을 던지는 주인공에 감동할 뿐이다. 재난 영화의 스케일로는 드웨인 존슨이 주연한 ‘샌안드레아스’를 넘는 영화를 보지 못했다. 캘리포니아 샌안드레아스 단층의 활동으로 규모 9를 능가하는 대지진이 발생한다. 빌딩이 무너지고 수만톤급 크루즈 선이 쓰나미를 타고 도시로 밀려온다. 거대 재앙에 맞서 가족을 구하는 드웨인 존슨의 영웅적인 행동에 심장이 떨린다. 그러나, 이 영화를 보고 샌아드레아스 단층에서 70km 떨어진 디아블로캐년 원전이 문을 닫지는 않았다.

또다른 재난 영화를 들자면 ‘투모로우’이다. 기후변화로 인해 빙하기에 직면한 전 지구적 재앙을 그렸다. 영화는 기후변화의 위험을 각성시키는 것도 있지만 본질은 고립된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희생을 감수하는 휴머니즘이다. 기후변화의 재앙을 보여주는 또다른 영화는 ‘설국열차’이다. 기후변화로 열차 속에 갇힌 사회에서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 인간 정신을 보여준다. ‘판도라‘가 국지적인 재앙을 말한다면, 이런 영화들은 세계적인 재앙을 얘기한다. 정말로 영화를 보고 정책을 세운다면 보다 더 큰 위험에 대해 세워야 할 것이다.

판도라의 상자는 희랍 신화에서 금단의 상자를 일컷는다. 인간의 호기심으로 금단의 상자를 열자 온갖 사악함이 쏟아졌다. 그러나 마지막에 나온 것은 이전에 나온 모든 것을 극복할 수 있는 희망이었다. 만약 중간에 상자를 닫았으면 우리는 희망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판도라에게 탈원전을 묻는다. “상자를 열었으면 닫지 마세요. 희망은 마지막에 나온 답니다. 공포의 끝은 희망으로 극복될 거예요”라고 하지 않을까. 공포는 과학을 이길 수 없고 희망은 우리가 과학을 하는 이유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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