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토 아돌프 아이히만(Otto Adolf Eichmann)은 제2차 세계 대전 홀로코스트(유대인 대학살)의 전범으로 악명을 떨쳤던 인물이다.

독일의 SS중령(최종계급)이자 게슈타포 유대인 과장으로서, 열차로 유럽 각지의 유대인을 폴란드 수용소로 이송하는 임무를 맡은 유대인 박해의 실무 책임자다.

그러나 제2차 세계 대전에서 독일이 패한 뒤 아르헨티나로 도피해 ‘리카르도 클레멘트’라는 가명으로 신분을 세탁했다. 그는 그곳에서 15년 간 자동차 공장의 기계공으로 살다가 1960년 5월 이스라엘 정보기관 모사드에 체포돼 공개 재판을 받고 1962년 6월 교수형에 처해졌다.

◯···독일 태생의 유대인 철학사상가 한나 아렌트는 1962년 미국 잡지의 특별취재원 자격으로 예루살렘으로 가서 아돌프 아이히만 재판을 참관했다.

그녀는 “자신은 수송부서 책임자라는 주어진 자리에서 유대인을 수용소로 실어 나르는 역할을 했을 뿐”이라고 주장하는 아이히만을 보면서 “아이히만은 괴물도 악당도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저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그의 행동을 ‘악의 평범성’이라고 정의했다.

즉 평범한 인간도 무비판적으로 지시를 따르면 악을 실행할 수 있다는 것이다.

때문에 한나 아렌트는 아이히만의 유죄를 주장했고, 그가 유죄인 이유는 아무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국가라는 조직에 충실히 복종했지만 자신의 행동이 타인에게 어떤 결과를 미치게 될지 생각하지 못했던 게 바로 아이히만의 죄였던 셈이다.

◯···최근 정치권은 김은경 전 환경부 장관의 구속여부를 놓고 시끄럽다.

김 전 장관에 대해 검찰이 청구한 구속영장은 26일 새벽 기각됐지만 야당은 “김 전 장관이 지난 정부에서 임용된 환경부 산하 기관 임원에게 사퇴를 종용하고, 현 정권에서 추천한 인사를 앉히려고 한 혐의를 받고 있다”며 이는 전형적인 블랙리스트라고 주장하고 있다.

반면 여당은 정부 부처 장관이 산하 기관 인사와 업무에 포괄적으로 감독권을 행사하는 것은 정상적인 업무라며 “대통령이 임면권을 가진 공공기관장에 대해 청와대와 해당 부처가 협의하는 것 역시 지극히 당연하다”고 항변했다.

이유야 어찌됐건 환경부 블랙리스트는 왠지 박근혜 정부 당시의 문체부 블랙리스트를 연상케 한다.

두 사안의 쟁점 중 하나는 관련 부처 공무원들이 윗선(청와대)의 지시를 받고 원하는 그대로 움직였느냐다.

앞으로 재판 과정을 거쳐 두 사건 모두 블랙리스트의 실체가 진실로 밝혀진다면 박근혜 정부의 문체부나 문재인 정부의 환경부 공무원들 모두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아이히만과 무엇이 다른가.

“중요한 결정을 미루는 공무원은 막상 그 결정을 내려도 아무런 해가 없을 때 한다”면서 공무원들의 무소신을 비꼰 시릴 노스코트 파킨슨(영국 경제학자)의 말이 생각나는 요즘이다.

‘악의 평범성’을 보여준 아이히만과 같은 공무원이 대한민국에는 없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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