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츠호텔은 지난 4년 동안 굉장한 시간과 돈을 들여 리뉴얼을 했고 2016년 5월 재개관을 했다고 하는데 이 호텔 1박의 숙박비가 최소 1000유로라고 하니 이 일을 어쩔까? 한국 돈으로 140만 원에서 시작하니 세금과 기타 비용을 합치면... 내 능력 밖의 세계이다. 그러나 이번 여행의 성격을 생각한다면 쉽게 포기할 수 없는 그런 비중이기도 하다. 돈을 많이 벌었던 그녀는 하루가 아닌 대부분의 인생 후반 30여 년을 리츠호텔에서 보냈는데 30년 패션 비지니스를 한 나는 하루의 방값도 멀쩡한 정신으로는 결정할 수가 없으니 역시 나는 비지니스에 ‘성공’자를 붙일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할 것 같다.

여행을 떠나기 전 한 달 동안 고민하다 내린 최종적인 결정은 그곳에서 숙박은 안하고 식사를 하면서 방을 보여달라고 요청해 룸투어를 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결코 아무에게나 그들의 방을 보여주지 않는다. 이럴 때 나에게 필요한 것은 페인트모션할 수 있는 능력이다. 마치 이런 수준의 호텔을 밥 먹듯 드나드는 여행객인 듯 “리츠방돔이 리뉴얼을 오랫동안 하는 바람에 다른 호텔로 투숙하게 돼 유감이다. 다음 여행엔 꼭 리츠방돔에 묵고 싶으니 방을 한번 보고 싶다”라고 요청하기란 나에겐 불가능하다. 흑기사로 와준 아들과 작전을 짜서 그들을 움직이게 만들어야 했다. 물론 이 글을 읽는 사람은 잘 이해를 못 할지도 모른다. 호텔방 구경 하는 것이 뭐 그리 어렵고 대단한 일이겠는가? 그러나 그들은 결코 아무에게나 친절하지도 않고 친절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우리는 파크하야트방돔의 컨시어지를 통해 레스토랑을 예약하고 그곳에서 점심식사를 했다. 식사하는 내내 우리의 작전이 성공할 것인지하는 우려가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다행히 여러 단계를 거친 끝에 나타난 매니저가 우리에게 방을 보여줬다. 리츠호텔은 실내 인테리어가 르네상스 스타일로 나의 취향은 아니었다. 파리에는 리츠호텔 수준의 호텔들이 꽤 있다. 아테네호텔, 포시즌스, 파크하야트. 내가 원래 봐야 할 방은 ‘샤넬룸’이었다. 그러나 그걸 보여주진 않는다. 방의 인테리어가 리츠호텔의 기존 인테리어와는 사뭇 다르다고 하는 것을 보면 흑백의 모던한 그런 분위기일 것이라고 추측된다. 그나마 운이 좋다고 해야 할까?

여러 타입의 방을 보여주어 구경도 잘하고 사진도 찍었다. 멋진 호텔인 것은 틀림없다. 단 숙박비에 자유로울 수 있다면.

여기서 내가 다시 한번 생각해야 할 것은 ‘그녀가 왜? 리츠호텔을 그녀의 베이스 캠프로 했을까?’라는 것이다. 천재인 그녀는 역시 천재다운 삶을 살았다. 한번도 정식으로 결혼을 한 적이 없는 그녀에겐 배우자나 자식이 없었다. 단지 오랫동안 곁에 있어 주는 집사가 있었을 뿐이었다. 프랑스와 영국 스페인 러시아 등의 귀족 고객을 거느리고 있는 그녀로서는 귀족들이 이용하는 호텔에 아파트를 빌려서 살면 기존의 고객관리도 용이한 한편, 새로운 고객과 접점을 마련하기도 쉬워진다.

그녀의 작업실과 아파트가 길 건너에 있었지만, 그 곳에서 잠을 자지는 않았다고 한다. 아마 주말이 되면 작업실 위의 아파트는 샤넬 혼자 남게 되는데, 그게 싫었을 것이 느껴진다.

리츠호텔에서 그녀는 피카소라든가 헤밍웨이 등 많은 예술가와 교류를 했고 그들을 위한 파티를 자주 열었다고 했다. 원래부터 귀족이 아닌 그녀의 입장에서 거저 물려받은 유산이 없이 귀족 같은 삶을 살기엔 유지비가 너무 많이 들테고 이는 결코 현명하지 못하다는 생각을 했을 것 같다. 또한 성공한 디자이너로 보여 줘야 하는 라이프스타일이 그녀에게 무엇보다도 중요했을 것이다. 무엇을 먹는지, 어디서 휴양을 하는지, 어떤 취미를 즐기는지, 그런 것들을 누구보다도 중요하게 생각했던 가브리엘 샤넬, 그녀는 모든 것에 전략이라는 단어를 붙여 생각하고 행동했던 것 같다. 누구보다 먼저 롤스로이스를 타고 승마를 즐기고, 유럽 최고의 휴양지 비아리츠에서 메종샤넬을 운영하고, 영국 최고의 부자 귀족인 웨스트민스터 2대 공작과 사귀고 파리 최고의 호텔 리츠에 자신의 아파트를 갖고….

이 세상의 모든 디자이너들이 각자 자신이 추구하는 타입의 삶을 살고 싶어 하듯이 그녀는 그런 면에서도 확실한 원조이며 모든 디자이너의 롤모델이 되기에 충분한 것 같다.

“불편한 것은 참을 수 있어도 아름답지 않은 것은 참을 수 없다.”

프랑스 사람들에게는 이 말이 있다고 한다. 이 말이 가장 프랑스다운 이야기일 것이다. 이것은 ‘에꼴드 파리’ 파의 예술가들이 당시 1900년대 초에 파리로 가서 살아야 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가브리엘 샤넬, 그녀는 디자이너인 동시에 아티스트들의 친구였다. 그녀의 절친이었고 피아니스트였던 미시아 세르는 당대의 유명한 화가들의 뮤즈였고 자신을 모델로 한 초상화를 많이 남겼다 그러나 가브리엘 샤넬은 미시아 세르트와는 반대로 거의 초상화를 남기지 않았고 영화배우 만큼 많은 사진을 남겼다. 자신의 미모를 사진으로 남기는 것이 화가의 초상화를 남기는 것보다 훨씬 전략적이라고 생각한 것 같다. 그녀만큼 자신의 철학이 확실한 여성을 난 아직 못 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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