럭셔리함과 젊음이 공존하는 ‘비아리츠’ 휴양지
특별함이 묻어나는 ‘해 지는 해변’

프랑스의 최고 남단. 스페인과 가까운 곳에 비아리츠라는 휴양지가 있다. 파리에서 TGV로도 4시간 이상 걸리는 먼 거리에 있지만, 이곳은 니스의 해변과는 또 다른 특별함이 있는 멋진 곳이다. 파리에서 자동차로 출발해 여러 곳을 거처 그곳 비아리츠에 늦은 시간에 도착했다.

내가 묵은 숙소는 블루 레디슨 호텔이었는데 그곳에서 오래된 시가지를 지나 바닷가로 갈 수있게 되어있다. 비교적 위치가 좋았다. 걸어서 바닷가를 쉽게 갈 수 있는 곳. 휴양지의 들뜬 분위기와 유럽 최고의 휴양지다운 럭셔리함. 오래전부터 꼭 한번 와보고 싶었던 핫 스팟에 왔다는 만족감을 누구에게라도 알려야 할 것 같은 그런 분위기였다. 휴양지마다 그 나름 대로의 분위기라는 것이 있다. 력셔리함이 있는 곳에 젊은 열기가 없고 뜨거운 젊음이 있는 곳엔 력셔리함이 공존하기 힘들다. 그러나 이곳은 이상하리만치 그 양면성이 함께 공존하는 그런 묘한 분위기가 있다.

아직 한국에 많이 알려지지 않은 프랑스 남부의 휴양지이기도 하고 접근도 스페인의 빌바오와 더 가까워서 빌바오를 오갈 때 꼭 함께 묶어서 다녀오라고 추천하고 싶은 휴양지이다. 아들과 단둘이 이곳에 도착하니 언젠가 반드시 여름휴가를 가족과 함께 다시 한번 오고싶다는 그런 생각을 하게 했다.

내가 도착했던 8월 초는 수국꽃이 시들기 시작해서 아쉬웠지만 가브리엘 샤넬이 그 옛날 그녀의 메종에 엄청 많은 수국을 심어서 화려함과 력셔리함을 유지했다고 했는데 그 모습을 연상할 수 있어서 좋았다. 그동안 어느 도시에서도 이곳처럼 도시에 많은 수국을 심어놓은 것을 본 적은 없는 것 같다. 수국은 일본처럼 여름이 습하고 비가 자주 오는 곳이어야 잘 자라고 꽃도 잘 피는데 이곳의 여름이 습하다는 것을 의미하는지는 모르겠다. 확실한 것은 우리나라의 호텔 결혼식에 장식용 꽃으로 가장 많이 사용하는 수국이 도시 전체를 장식하고 있는 모습은 마치 력서리한 파티장에 온 것 같은 그런 느낌을 주었다.

2차 대전이 시작되고 프랑스의 귀족들이 이곳으로 피난을 올 때 가브리엘 샤넬은 이곳에서 활발하게 비지니스를 성공시켰다는 것이 놀랍다. 샤넬은 1910년 파리의 캉봉거리에 모자가게를 열어 큰 성공을 거두었고 1913년에 문을 연 도빌의 가게 역시 성공을 했고, 이를 발판으로 비아리츠에 새로운 부티크가 아니라 진정한 메종 드 꾸뛰르를 개장하기로 결정한 것은 1914년, 그녀가 연인과 함께 이곳에 체류하던 때였다. 모든 명사들이 전쟁이라는 소동과 멀리 떨어진, 당시 유행하던 비아리츠에 찾아왔고 더불어 파리의 여러 양장점이 문을 닫는 이 혼돈의 시기가 양장점을 필요로 하는 고객을 그곳으로 불러모아 주었던 것이다.

전쟁에도 불구하고 가브리엘은 그녀의 동생과 함께 세 번째 가게이자 여성의 몸매를 자유롭게 하는 첫 ‘메종 드 모드’를 열었다. 짧아진 드레스, 여성을 위한 바지, 커트머리... 그 때까지는 남성이 입던 옷들을 세밀하고 세련되며 적절한 소재의 선택으로 여성의 몸매에 맞춘, 이 완벽하게 혁신적인 아이디어로 비아리츠에서의 도전은 성공했다. 이 놀라운 아이디어들과 현장에서 채용한 예순 여명의 재봉사들의 수고 덕분에 그 곳에서 그녀의 심플한 의상이 우아함과 세련미를 지녔음을 빠르게 증명할 수 있었다. 그녀의 블랙과 화이트의 매치는 여성에게 자신있고 눈에 띄며 반짝이고 활기찬 이미지를 주기에 충분했다. 그녀는 모델들을 장식하는데 뛰어났고, 여성은 자신이 여성임을 잊지 않을 수 있었고 남성들은 이 새로운 유혹과 천재적인 그녀의 영향 아래 있었다. 가브리엘 샤넬 그녀 자신이 최고의 모델이었고 그녀의 여자 친구들 역시 그 역할을 했다.

내가 비아리츠에 가기 전까지는 그 곳 팔레스호텔이 그녀가 러시아 황제 니콜라스 2세의 조카였던 드미트리 로마노프와 친분을 맺은 장소였다는 것을 미처 알지 못했다. 때문에 예약이 안 된 상태에서 동양 여자에게 궁전의 철문 같은 문을 도어맨은 열어주지 않아서 그 앞에서 돌아서야 했다. 이런 것은 준비 부족이었다.

팔레스호텔에 투숙은 못해도 레스토랑이라도 예약을 했으면 한번 둘러보면서 가브리엘 샤넬의 생각을 조금이라도 느껴볼 수 있었을 텐데 한여름 성수기에 누구의 ‘빽’도 그 곳의 출입을 도와주지는 못했다.

가브리엘 샤넬이 비아리츠의 샬롱을 여는데 러시아 황제의 조카였던 드미트리 로마노프는 큰 후원을 했을 것이라고 전해진다. 이런 스토리를 쫓아가다 보면 샤넬이 얼마나 전략적이었는지 눈에 선하다. 드미트리 노마노프는 젊은 샤넬의 세련됨 앞에서 말 그대로 녹아버렸을 것이다. 샤넬은 그녀의 ‘빌라 라랄드’ 작업장에서 백여 명의 노동자들을 관리했다. 비아리츠에서 만들어지고 소개된 컬렉션들은 미국인들에게 각광을 받았다. 사업가인 드미트리는 그녀에게 조향사인 ‘Ernest Beaux’를 소개했다. 그는 가브리엘 샤넬에게 향기들의 섬세함과 복잡한 혼합을 가르쳐 준다. 뒤이어 메종 부르조아의 주인인 ‘Pierre Wertheimer ’가 N°5 의 제작을 기획 중인 가브리엘 샤넬을 후원하기 시작한다.

비아리츠는 샤넬에게 이렇게 중요한 장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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