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브리엘 샤넬을 찾아가는 길<18><6장> 한 편의 영화 같은 도빌 그리고 샤넬의 숍 / 두 번째 이야기
1913년 도빌 ‘공토비롱’가에 의상실 열어
샤넬만의 감각적이고 독특한 디자인 쏟아내
작성 : 2018년 11월 08일(목) 15:19
게시 : 2018년 11월 09일(금) 1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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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도빌의 공토비롱 거리에 있는 코코 샤넬의 숍 전경.

도빌은 가브리엘 샤넬이 1913년 이곳 공토비롱가에 의상실을 개업해 본인의 재능을 확인한 도시다. 샤넬의 숍이 있던 자리엔 “이곳이 샤넬숍이 있었다”는 조그만 안내판이 있다. 지금은 프랑스의 캐쥬얼 브랜드 쟈딕엔 볼테르가 매장을 운영하고 있다.
샤넬의 인생에서 중요했던 도빌에 샤넬 브랜드 매장이 없다는 것은 처음엔 믿지 않았었다. 에르메스나 루이비통도 다 있는데 특별히 샤넬 매장이 없는 것은 내가 못찾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시내 한복판에 ‘가브리엘’이라는 카페가 보여서 그곳에서 점심식사를 했다. 그곳은 지난해 새로 생긴 카페인데, 카페주인이 가브리엘 샤넬을 좋아해서 그렇게 이름을 지었다고 했다. 메뉴판에도 샤넬의 사진이 보였다.
그녀가 이용했다고 하는 호텔에 묵으며 이른 아침 바다로 난 창을 열고 바다를 바라보니 아직 어스름한 운무가 깔려 있는 새벽이지만 한 무리의 새벽 승마를 하는 라이딩팀이 보인다. 그 모습을 보자 승마를 잘했던 가브리엘 샤넬도 이곳에 오면 저들처럼 해변을 달렸을 것 같았다.
그녀의 운명을 무명과 유명으로 가르는데 승마의 역할이 가장 크게 작용했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지금이나 그때나 일반 사람들이 귀족과 어울리고 관계를 형성하는 것은 미인이라는 조건만으로는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녀가 첫 번째 남자친구 ‘에티엔 발장’의 루아얄리외 저택에서 몇 년간 살면서 일상의 무료함을 달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승마를 하는 것이었다. 명석한 그녀가 신분 상승을 위한 의도였는지는 모르지만, 승마는 분명 그녀를 상류사회로 진입할 수 있는 ‘패스포트’같은 역할을 했다고 보여진다.
승마는 나중에 웨스트민스터 공작과 사귈 때도 이튼홀에서 마치 귀족의 딸이었던 것처럼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포인트였을 것이다.
바이에르 호텔에서 그녀가 타고 오르내렸을 엘리베이터를 타고 그녀가 한 번쯤 앉았을지 모를 의자에 앉아서 식사를 하며 샤넬의 노력과 능력, 샤넬의 운명을 머릿 속에 그려본다.
막상 이곳에 도착했을때, 기대하던 8월의 태양이나 ‘보석 같은 햇살이 넘치는’ 도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뿐만이 아니라 늘 구름과 비와 바람이 교차하는 사이 어쩌다 햇살은 가끔이나 볼 수 있는 것이란 느낌을 여러 곳에서 받았다.
프랑스 사람들의 감각으로 표현한 도빌 해변의 상징 같은 파라솔 색상을 보면서 나는 내 방식대로의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바이에르 호텔의 1층 로비나 로열 레스토랑의 인테리어 색상을 보면 구름이라는 두꺼운 커튼을 치고 강렬한 레드로 무대장식을 한 무대 같았다. 프랑스에선 유명한 해변마다 그들 고유한 색상이나 패턴을 사용한 파라솔을 그곳의 상징처럼 보여준다.
아리츠의 각양각색의 스트라이프 색상의 파라솔...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었던 도빌의 채도가 높은 삼색 파라솔은 그곳의 날씨가 고려된 디자인 일 것이라는 생 각이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을 때 프랑스의 귀족 부인들은 파리의 소란을 피해 도빌로 몰려와 있었고, 그들이 필요한 옷은 휴양지에서 편하게 입을 수 있는 캐쥬얼 의상이었다.
샤넬은 여동생과 자신이 모델이 돼 새로운 저지 의상을 입고 방갈로 앞의 데크를 우연을 가장해 패션쇼 하듯 거닐었고 그 스타일을 본 귀족 부인들은 매장으로 몰려와서 의상을 주문했다고 한다.
그녀의 성공엔 여러 가지 셀수 없는 요소가 많겠지만 특히 그녀의 미모가 가장 중심 역할을 했으리라고 여겨진다.
그녀의 일생을 조망하고 자료를 찾아보며 놀란 것은 그녀가 굉장한 미모의 소유자이며 그 당시 사회적 배경으로 보면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수준 높은 사진을 어느 배우보다 많이 남겼다는 것이다. 그것도 모두 특별하게 연출된 세련된 사진들이다.
그녀는 자신의 외모가 어떤 역할을 하는지, 할 수 있는지 잘 알았고 항상 노력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프랑스나 영국 등 유럽의 귀족들은 화가를 정해서 자신들의 모습을 기록으로 남겼고, 사진기가 나온 뒤로는 전속 사진작가를 곁에 두고 기록으로 자신들의 이미지를 남겼다.
아마도 그런 것을 일찍이 알게 된 그녀가 철저한 전략적 접근으로 그 많은 이미지의 사진을 남겼을 것이다. 오랜 시간이 흐른 후 내가 그녀의 자취를 찾을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글・그림・사진 / 김영일 기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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