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을 탈 때마다 자리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장거리를 갈 경우 가방이 무거우면 한손으로 휴대폰도 봐야 하는데 오래 서 있으면 피로가 몰려온다. 나도 아줌마의 반열에서 시니어를 준비하는 나이에 접어들었는지 빈 경로석을 넘보다가 앉기라도 하면 마흔 둘에 낳은 우리집 늦둥이는 화를 내며 나를 일으켜 세운다. 어르신들이 타면 일어설 것이라고 해도 막무가내다. 아마 두 가지 이유에서 그런 것 같다. 어르신들의 경로석을 빼앗으면 안 된다는 윤리의식과 자기 엄마가 할머니로 인식되는 게 싫어서 일 것이다.

88년 서울올림픽 때 재미있는 예화가 있었는데 세상에서 제일 빠른 남자 칼 루이스와 벤 존슨이 지하철에서 달리기를 하면 누가 이길까 하는 질문이었다. 정답은 ‘한국 아줌마’였다. 특히 환승역에서 지하철 문이 열리면 재빠르게 뛰어 들어와 자리를 차지하는 위대한 아줌마들의 얼굴에는 안도와 자랑스러움의 미소가 스친다. 친구와 함께 움직일 경우에는 더 그렇다. 심지어 지하철 내에서 자신과 거리가 좀 있는 빈 자리에 가방을 먼저 던져 찜해 놓고 그 자리에 비집고 들어와 앉는 것도 보았다. 그러나 그기쁨도 잠시, 그 자리에 영원히 머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 세상을 떠날 때 태어난 순서대로 가지 않듯이 자신의 종착역에서 내려야 할 타이밍이 반드시 다가온다. 잠시 편한 그 자리보다 영원한 안식을 주는 내 집이 진짜 돌아갈 자리다.

사람이 살면서 치열한 자리다툼으로 얻은 좋은 자리도 결국 이 세상을 떠날 때는 다 내놓아야 한다. 이웃과 주차 자리를 놓고 말다툼을 하다가 흉기를 휘두르는 사태로 이어지는 것도 자리를 위한 싸움이다. 낚시터에서 고기가 잘 잡히는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지인과 싫은 소리 하다가도 이런 일들이 벌어지곤 한다. 사람들이 종교를 갖는 이유 중 하나는 사후에도 천국이든 지옥이든 좋은 자리에 머물고 싶기 때문이다.

'자리'의 사전적 의미는 사람이나 물체가 차지하고 있는 공간이나 어떤 변화를 겪고 난 후 남은 흔적, 또는 의자 같은 집기나 잠자리를 의미하기도 한다. 더 나아가 포지션(Position : 사회적 집단에서 연령·성(性)·직업·소득 등에 따라 결정되는 개인의 위치)도 연상되는데 자신이 속한 집단의 제도나 규칙에 의해 정해지는 역할을 의미한다. 개인에게 역할이 부여되면 기대에 부응해 위대한 공헌을 하기도 하지만 그릇에 맞지 않는 사람에게 자리가 주어지면 공멸의 비극을 낳기도 한다. 특히 자질이 안 되는 CEO나 지도자한테 자리를 주면 경제나 사회가 수십 년 후퇴하고 나라가 패망하기도 한다. 대표적인 예로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키고 6백만 명의 유대인을 학살한 독일의 아돌프 히틀러나 16세기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 같은 인물이다.

고려의 무신 출신으로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는 위화도 회군을 통해 왕의 자리에 올랐지만 자리에 대한 욕심이 많았던 다섯째 아들 이방원에 의해 두 차례에 걸쳐 피비린내 나는 왕자의 난을 목도해야 했다. 영국의 동물학자인 존 브래드쇼는 그의 저서 캣센스(Cat Sense)에서 야생의 습성이 남은 집고양이들의 자리(영역) 싸움에 대해 흥미로운 관찰을 전했다. ‘서로 접촉을 꺼리고 날카롭게 응시하며 화가 난 소리를 낸다. 자는 척하지만 실제로는 경직된 자세로 귀를 움찔거린다. 고양이들이 다니는 출입로나 계단 맨 위로 올라가 몇 시간씩 앉아 상대의 움직임을 제한한다.’

자리다툼은 인간이나 동물세계에서 오늘도 내일도 계속되는 전쟁이다.

나는 정권이 바뀌고 대통령이 바뀔 때마다 한 사람의 국민으로서 품었던 새로운 희망이 절망으로 바뀌곤 한다. 집권 초기에는 대대적인 개혁을 하고 권력의 핵심에 있던 부패세력들을 척결하지만 말기에 가서는 어김없이 자신도 친인척 비리에 연루되고 그 다음 정권에서 감옥으로 가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기 때문이다. 지자체 장들도 전임자가 벌여놓은 사업들은 무조건 중단시켜 국고를 낭비하는 보복정치가 계속되고 있다. 그래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선거에서 이겨 집권을 통해 좋은 자리를 차지하려 한다. 권불십년(權不十年), 즉 10년 가는 권력이 없다는 옛말을 깨닫는 사람이 많을수록 세상은 살 만한 곳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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