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끼'치고 '브로커'까지 등장…직접생산 뿌리째 흔들

# 9월초 어느 날, 기자는 경기도 한 카페에서 그를 처음 만났다. 중년 남성으로 보이는 그는 자신을 소프트웨어 개발자라고 소개했다. 익명을 요구한 개발자 A씨는 자신이 과거에 전력업계 몇몇 기업을 상대로 일정 비용을 받고 전력량계의 CPU(두뇌)에 해당하는 소프트웨어를 만들어줬다고 고백했다. 당시 프리랜서 개발자로 활동한 A씨는 기업에서 먼저 의뢰가 들어왔다고 했다. 일종의 외주작업(아웃소싱)이다. 이들 기업은 현재 스마트미터 분야에서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회사로 성장했다. 심지어 이렇게 성장한 기업 중 일부는 역으로 신규업체의 의뢰를 받아 완제품을 만들어준다고 했다. 지금은 프리랜서 일에서 손을 뗐다고 하는 A씨는 자신과 비슷한 일을 하는 개발자가 더 있다고 전했다. 그의 입을 통해 스마트미터 업계에 만연해 있는 ‘뒤틀린 아웃소싱’의 실체를 들여다보고자 한다.

◆외주 개발자의 존재, 기업들은 왜 그를 찾는가

A씨는 10년전 한 기업에 전력량계의 두뇌에 해당하는 핵심 소프트웨어를 개발해줬다. 알고리즘 개발과 더불어 기술고문, 향후 A/S까지 포함한 거래다. 당시 한전이 관리하던 국내 전기 계량기는 큰 변화를 맞았다. 100년간 상용화된 기계식 전력량계(아날로그 방식)가 전자식으로 교체되고 있었다.

기계식과 달리 전자식은 디지털화된 전산프로그램이 탑재된다. 정확한 계측을 위해 프로그램화된 펌웨어를 칩에 적용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 때문에 당시 몇몇 기업들은 A씨에게 전자식 전력량계의 펌웨어 개발을 의뢰했다. 뒤이어 그의 의뢰인 명단에는 또 다른 기업들이 속속 추가됐다.

A씨는 “전자식 전력량계 보급이 처음 시도되다보니 소프트웨어 개발이 쉽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된다”며 “기업이 연구개발에 투자하기보다 외주화가 비용편익 측면에서 훨씬 유리했다고 알고 있다”고 말했다.

이렇게 전자식 전력량계의 소프트웨어를 쉽게 얻은 기업들은 제품생산과 운영, 관리과정을 통해 실질적인 설계능력을 갖춘 제조사로 성장했다.

A씨의 얘기는 이게 끝이 아니다. 충격적인 것은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지금, 이제는 소프트웨어만 선별적으로 아웃소싱하는 것이 아닌 완제품 형태의 아웃소싱이 자행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는 “전력량계 설계능력을 갖출 수 있게 도와준 기업들은 현재 국내 최대 수요기관인 한전의 요구에 맞게 어떤 스마트미터도 만들 수 있는 위치에 올랐다”며 “이렇게 성장한 기업 중 일부는 현재 신규업체에 전력량계를 완제품 형태로 판매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과거 개발능력이 부족해 핵심부품을 만들어달라고 의뢰를 한 기업이 이제는 자생력을 키워 의뢰를 받는 쪽으로 성장한 것이다. 다른 점은 소프트웨어 아웃소싱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아예 완제품을 만들어 주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정부의 ‘직접생산확인’ 제도의 근간을 해치는 행위라는 점에서 문제의 심각성이 크다고 볼 수 있다.

스마트미터업계의 이 같은 ‘완제품 외주화’는 또 다른 프리랜서 개발자인 B씨를 통해서도 들을 수 있었다. 경기도의 한 사무실에서 만난 B씨 역시 자신을 펌웨어 개발자라고 소개했다. 그는 지금까지 5개 이상의 기업에 전력량계 펌웨어를 개발해줬다고 설명했다. 이중에는 전력량계 설계능력이 전혀 없는 기업도 포함됐다고 B씨는 전했다.

B씨는 “한전은 계속해서 전력량계의 소프트웨어를 업그레이드해왔는데 특히 최근에는 보안기능이 추가되는 등 더욱 복잡해졌다. 이 때문에 개발능력이 부족한 기업들이 내게 펌웨어를 만들어달라고 주문했다”며 “개발부터 시험기관 테스트통과, 양산에 이르기까지 전 과정을 맡아달라고 의뢰한 기업도 있었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펌웨어를 대신 개발해줬거나 관련 기술을 제공한 기업들 중 일부가 스마트미터 사업에 진출하려는 회사에 전력량계를 만들어주는 것으로 알고 있다”며 “신규업체가 의뢰하기도 하고, 그 반대경우도 있는데 업자들은 이를 소위 ‘새끼친다’고 부른다. 10여곳에 완제품을 판매하고 있는 회사도 있는 것으로 안다”고 덧붙였다.

◆전력량계 ‘완제품 아웃소싱’ 만연, 이유는 무엇일까

스마트미터 업계에서 전력량계 ‘아웃소싱’은 이미 공공연한 비밀이 된 지 오래다. 핵심부품의 외주화도 논란거리지만 이제는 도를 넘어서 완제품 형태의 거래가 ‘아웃소싱’이라는 이름으로 횡행하고 있다. 정부가 강조하는 제조사의 ‘직접생산’ 의미가 무색해지는 대목이다.

최근에는 이 같은 ‘완제품 아웃소싱’을 중간에서 매개하는 브로커도 등장했다. 사업 확장을 고민하는 전력기자재 업체에게 ‘전력량계 아웃소싱’을 알선하는 것이다.

익명을 요구한 업계 한 관계자는 “특정 브로커가 신규업체에 전력량계 생산에 필요한 전반적인 사항과 한전입찰 정보를 컨설팅해주는 것으로 알고 있다”며 “심지어 완제품을 구매할 수 있도록 스마트미터업체를 소개해주고 있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이 같은 완제품 판매가 본격화한 것은 최근 2~3년의 일이다. 정부가 국책사업으로 AMI(지능형검침인프라) 보급을 시작하면서 스마트미터 수요가 크게 늘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시장에 진입하려는 기업들이 늘어나고, 연구개발을 위한 큰 비용투자 없이 검증된 제품을 원하다보니 ‘완제품 거래’가 음성적으로 행해지고 있는 것이다.

기존 업체로서는 ‘완제품 판매’를 통해 새로운 수익채널을 확보할 수 있고, 신규업체들은 손쉽게 한전시장에 진입할 수 있으니 서로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는 셈이다.

그럼 신규업체는 왜 직접개발 대신 완제품 형태의 구매를 원하는 것일까.

소프트웨어 개발자 A씨와 B씨의 말을 종합해보면 이유는 두 가지로 압축된다.

우선 리콜 리스크를 최소화하기 위해서다. 신규업체들은 한전에 전력량계를 공급하는 것이 주된 목표다. 하지만 한전은 엄격한 품질시스템을 통해 치명적인 결함이 생긴 전력량계는 전량 리콜하고 있다. 생산경험이 떨어지는 신규업체의 경우 품질결함에 따른 리콜은 엄청난 부담으로 작용할 수 있다.

A씨는 “한전의 기자재 공급시스템은 매우 까다로워 소프트웨어가 완벽하지 않으면 늘 리콜 대상이 될 수 있다”며 “하드웨어는 수정이 가능하지만 통신프로토콜의 경우 오류가 나면 치명적 결함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업체들이 중압감을 느낀다”고 말했다.

이어 “한전에 납품한 제품이 모두 리콜되면 비용만 수십억원이 들어가는데 중소기업이 감당할 수준을 넘어선다”며 “리스크 최소화 측면에서 검증된 소프트웨어를 가져가 쓰는 경우도 있지만 아예 완제품 형태를 원하는 곳도 있는 것으로 안다”고 덧붙였다.

두 번째는 비용절감 효과 때문이다. 한전에 전력량계를 납품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인 생산인력과 시설을 갖춰야 한다. 시험비용 등을 포함하면 업체설립을 위해 최소 5억원 이상 들어간다. 그러나 시설과 인력을 그럴듯하게 갖추고 완제품을 가져와 적당히 가공하면 비용을 크게 줄일 수 있다는 게 업계 전문가의 설명이다.

◆해결책은 없나?

스마트미터 업계 관계자들을 만나면 흔히 듣는 얘기가 있다. 자회사를 만들거나 ‘새끼’를 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 다른 기업도 다 하는데 나만 하지 않으면 바보라는 말도 덧붙여진다. 한전시장에 진입하는 신규업체들이 지난해보다 2배 가까이 증가할 것으로 예상되면서, 일부 기업들은 ‘완제품 판매’를 매출확대를 위한 사업전략으로 가져가고 있는 것이다.

공공시장에 제품을 판매하기 위해서는 기업이 직접 필수공정을 거쳐 제품을 생산해야 한다. 이를 어길 경우 정부가 정한 ‘직접생산확인기준’ 위반이다.

하지만 완제품 형태의 아웃소싱 거래를 시장에서 막을 수 있는 방법은 불가능에 가깝다. 단속과 적발이 어렵기 때문이다. 더구나 완제품을 가져다 적당한 조립과 가공을 통해 직접생산제품으로 둔갑시킨다면 내부를 뜯어보지 않는 한 발견은 더욱 어렵다. 기업의 윤리적 책임감이 강조되는 부분이다.

이러한 거래를 근본적으로 차단하기 위해선 직접생산의 지표로 활용되는 ‘직접생산확인기준’을 지금보다 높게 설정하는 것이 한 방법이 될 수 있으나, 중소기업에 대한 과도한 규제로 작용할 수 있어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제품을 공급받는 공공기관에서 기업의 제조능력을 실제로 확인하는 방법이다. 그러나 이 역시 여건상 쉽지 않다는 게 한전 관계자의 귀띔이다.

익명을 요구한 한전의 한 관계자는 “지금도 공사는 서류심사, 현장심사, 품질테스트 등을 통해 제품성능을 철저히 검증하고 있다”며 “한전 규격에 맞는 제품을 구현했다고 판단되면 그것이 아웃소싱 형태인지는 구별이 어렵다”고 말했다.

이어 “자신의 공장에서 직접 생산하는지 실시간으로 확인할 수는 여력이 없고, 기업이 보유한 전문가의 설계능력 수준을 어떤 방식으로 판별할 것인지에 대해서도 말들이 많기 때문에 실제 제조능력을 가늠하는 것은 어렵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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