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서적 출판 45년 외길…값진 노동할 수 있어 감사”

1973년 설립된 성안당은 국내 대표적인 기술서적 전문 출판사다.

책이 귀했던 시절 성안당이 내놓은 기술서적은 이를 갈망하던 이들에게 오아시스와 다름없는 존재였다.

지금껏 성안당이 출간한 책은 3000종이 넘는다.

초창기에는 외국서적을 번역하는 데 머물렀지만 반세기 가까운 세월이 흐른 지금 성안당의 책은 미국, 일본, 중국으로 번역돼 나가기에 이르렀다. 성안당의 역사는 창업자인 이종춘 회장의 삶과 궤를 함께한다.

그는 어떠한 확고한 철학이나 목표를 갖고 성안당을 세운 것은 아니며 주변의 도움으로 여기까지 온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기술서적 전문 출판사는 교육기관과 다를 바 없다는 생각으로 평생 ‘값진 노동’을 해온 것 같다고 밝혔다.

‘출판사=교육기관’ 신념 품어

이 회장은 1970년대 서울 영등포에 서점을 열면서 출판계와 첫 인연을 맺었다. 교과서 공급 사업에 뛰어들었는데 이를 위해서는 서점이 필수였기 때문에 시작한 일이었다. 당시 영등포와 구로 일대는 제조공장이 밀집돼 있었다. 서울의 성장 동력이었던 셈이다. 이 회장은 영문서적이나 일본서적을 구해 기술자들에게 주곤 했는데 꽤 인기가 높았다고 한다.

“당시에는 우리나라가 국제출판협회에 가입돼 있지 않았기 때문에 저작료를 고려하지 않았을 때죠. 마땅한 기술서적이 없었기 때문에 번역도 안 된 서적들을 카피해서 보곤 했어요. 특히 일본서적이 많았죠.”

이 회장은 본격적으로 외국의 기술서적을 번역해 제공하기 시작했는데 일간공업신문이나 전파과학사 등 일본 출판사에서 나온 기술 잡지가 주류를 이뤘다. 이중 오옴사는 최근까지도 활발하게 교류하고 있는 출판사 중 하나다. 그는 오옴사가 출판을 넘어 도쿄전기대학을 설립해 운영하는 것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기술서적 전문 출판사의 역할에 대해 눈을 뜬 계기가 되기도 했다.

“간혹 성안당은 공과대학 하나 설립한 셈이라는 우스갯소리를 하곤 합니다. 저희가 출판한 책으로 수많은 이들이 전문성을 높이고, 자격증을 취득하고 했으니까요. 출판사는 교육기관과 다를 바 없다는 게 저의 오랜 신념입니다.”

3000종 넘는 전문서적 출간

성안당이 지금껏 출판한 서적은 3000종이 넘는다. 전문 지식을 보급해 국가발전에 기여하겠다는 기업이념에 걸맞게 전기, 전자, 기계, 소방, 반도체, 자동화 등 다양한 전문 서적을 발행 중이며 최근에는 IT, 인문교양, 경제경영, 학습서 등으로 영역을 확대하며 종합출판사로 성장 하고 있다.

기술서적은 판매부수 1만부를 넘기기가 쉽지 않다는 게 통설이다. 트렌드 변화가 빠른 데다 전문화된 영역이다 보니 독자층이 좁기 때문이다.

이 회장이 기억하는 판매부수 1위는 다름 아닌 ‘ISO 규격집’이다. 미국 서적을 번역한 이 책은 각종 현장은 물론이고 전문대학, 대학교 등을 중심으로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10만부가량 판매됐다고 하니 전문서적으로서는 기록적인 수치다.

성안당이 시대의 흐름을 읽는 혜안을 가진 출판사라는 것을 보여주는 좋은 예라 할 수 있다. 실제 이 회장은 지금껏 성안당을 운영하면서 어떻게 하면 좋은 책을 만들 수 있을까 고민했지 안 팔릴까 걱정한 적은 없다고 한다. 당연히 재고가 많아 큰 어려움을 겪은 적도 없다.

성안당은 최근에도 ‘홈런’을 날렸다.

만화가 석정현 씨가 9년 만에 내놓은 ‘석가의 해부학 노트’가 바로 그것이다. 총 650페이지에 2000점에 달하는 삽화로 구성된 이 책은 인체의 움직임을 유쾌하고 기발하게 그려냈다는 평가를 얻고 있다. 실제 책을 본 수많은 아티스트들이 극찬을 아끼지 않는다고 한다. 현재까지 판매부수는 약 4만부에 달한다니 성안당의 효자가 아닐 수 없다.

이 회장은 “9년이라는 긴 기다림이 있었던 책이지만 반응이 워낙 좋아 매우 기쁘게 생각한다”면서 “11월 일본에서 번역돼 판매될 예정이며 영문판도 계획 중”이라고 밝혔다.

지금껏 큰 난관은 없어…모든 게 감사할 따름

이 회장은 유명하다는 작명소에서 성안당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살필 省, 편안 安. 이 회장은 소소한 어려움은 있었지만 동종기업이 모두 겪는 것이었을 뿐이라며 이름 덕분인지 큰 난관은 없었다고 말했다. IMF시절 서울 마포구 서교동에 사옥 건립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시공사가 부도났지만 그뿐이었다. 신기할 정도로 술술 일이 풀려나갔다.

“주거래은행에 부족한 자금을 요청했는데 넉넉하게 대출을 받으라고 권유하더라고요. 액수가 너무 커서 덜컥 겁이 났지만 필요하지 않을 경우 예금으로 전환하면 높은 이자를 받을 수 있다고 해서 그렇게 했어요. 시공사가 부도날 것은 전혀 예상치 못했어요. 하청업체까지 연쇄부도가 우려되는 상황이었죠. 대출받은 돈으로 우선 밀린 월급을 지급했고, 사옥 건립은 정상적으로 마무리됐습니다.”

당시 온 나라가 경제적 혼돈을 겪었지만 성안당은 오히려 매출이 증가하는 기이한 상황을 맞았다. 수많은 실업자들이 새로운 직업을 찾기 위해 전문서적에 몰두했기 때문이다. 이 회장은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며 당시를 회고했다.

성안당도 기업이므로 매출이나 이윤을 고려해야 하지 않냐는 질문에 그는 모든 화는 욕심에서 비롯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에게 매출 목표는 신간을 발행할 수 있고, 직원에게 월급을 주고 세금을 낼 수 있는 수준이다. 그렇게 성안당을 지켜온 것이다. 이에 대해 독실한 기독교도인 이 회장은 하나님께서 특별히 돌봐주신다는 생각이 든다며 모든 게 감사할 따름이라는 말로 대신했다.

글로벌 북미디어 그룹을 향해 순항 중

성안당은 실용도서를 출간하는 ‘성안북스’, 소설 등 단행본 중심의 ‘황금 부엉이’, 기업 교육을 전담하는 ‘사이버출판사’ 등의 여러 자회사를 거느리는 명실상부한 북미디어그룹이다.

이 회장이 최근 들어 가장 주력하는 분야는 온라인 동영상 교육시스템인 이러닝(E-Learing)이다. 그는 학원을 다니고 싶지만 여건이 허락되지 않는 이들에게도 공평하게 교육기회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동영상 교육이 매우 유용하다고 극찬했다. 전기, 기계, 건축, 소방, 토목 등 전문서적의 저자가 직접 강의를 하기 때문에 독자들의 만족도도 상당하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판서하는 강사의 수업을 듣거나 종이책으로 독학하던 시대도 있었습니다. 이제는 세상이 달라졌어요. 온라인 동영상 교육은 매우 경제적이고 효율적인 것 같습니다. 더 많은 독자들이 혜택을 누릴 수 있다면 좋겠어요.”

이 회장은 여전히 발간 예정인 책을 놓고 편집부 직원들과 다툼 아닌 다툼을 하곤 한다. 대화 과정에서 맞춤법에 맞느냐며 설전을 벌이기도 한다. 매일같이 종이 냄새를 맡지만 정작 자신이 좋아하는 책에는 많은 시간을 할애하지 못한다는 게 그의 말이다. 영락없는 ‘책쟁이’의 모습이다.

“큰 명예나 부도 필요 없습니다. 저로 인해 대한민국 과학기술이 조금이나마 발전할 수 있었다면 큰 위안이 될 것 같습니다.”

그의 나이 79세. 반평생 책과 함께 살아온 그가 건넨 마지막 말이 큰 울림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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