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나 카레니나’는 1860년대 러시아의 농노 해방 시기를 배경으로 다룬 작품이다. 고관대작 남편과 정략 결혼한 안나가 젊은 장교 브론스키와 금단의 사랑에 빠지면서 모든 걸 잃게 된다는 이야기로 거칠게 압축할 수 있다.

다만 3권 분량의 책을 2시간여의 공연으로 압축한 뮤지컬은 안나와 브론스키가 급격하게 사랑에 빠지는 과정이 설득력이 다소 부족하다는 평이다. 그러나 여기서 안나 역의 정선아가 빛을 발한다.

사랑과 결혼, 가족 문제 등 보편적인 소재를 통해 질투, 신념, 욕망, 사랑 등의 감정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소설을 비약한 부분이 안나를 중심으로 안정적인 궤도에 진입한다.

사랑하지 않은 남편과 눈도 마주치지 않고 무심하게 볼 키스를 나누는 모습, 브론스키와 격정적으로 키스를 나누는 장면에서 정선아는 안나의 하강 곡선과 상승 곡선을 롤러코스터 타듯 가파르게 그려나간다.

비슷한 캐릭터로 정선아가 저돌적인 ‘에비타’를 연기했던 것은 20대의 초중반이다. 성숙한 30대 중반이 된 뮤지컬 디바는 충일한 감정으로 평면에 묘사된 안나에 입체감과 설득력을 불어넣는다.

또한 안나 카레니나가 주목받은 이유는 국내에서 보기 드문 러시아산 뮤지컬이기 때문이다. 현지 뮤지컬 프로덕션인 모스크바 오페레타 시어터의 세 번째 작품이다. 한국의 마스트 엔터테인먼트(대표 김용관)가 세계 처음 라이선스로 선보이고 있다.

넘버가 광활한 러시아처럼 끊임없이 휘몰아친다. 브론스키를 처음 만난 뒤 안나가 혼란스러운 감정을 노래한 '눈보라'가 정점이다. 전체적으로 노래들은 드라마를 그대로 녹여내 탓에 고음과 저음이 변화무쌍해 배우들이 소화하기가 어렵다. 이로 인해 고난도 가창력을 선보인 뒤 박수를 자연스레 유도하는 넘버는 거의 없다.

다만 쇼스타퍼(show-stopper) 무대는 있다. 안나 뿐만 아니라 대중이 열렬히 환호하는 소프라노 패티. 그녀가 부르는 ‘오, 나의 사랑하는 이여’는 안나의 슬픈 마음을 투명하게 투영한다. 이 역에 더블캐스팅된 강혜정과 김순영의 훌륭한 가창이 뒷받침된다.

무대가 생각만큼 화려하거나 색다르지는 않다. 롤러블레이드를 이용한 스케이트 장면은 다른 뮤지컬 ‘더 라스트 키스’에서 이미 익숙하다. 화려한 군무도 눈에 띄지 않는다. 대신 기차역, 경마장, 벌판 등 다양한 배경을 영상을 활용해 깔끔하게 표현한 점은 특기할 만했다.

소설에서 또 다른 주인공인 레빈은 안나에 비해 비중이 작어졌다. 초반에는 안나는 주목받지만 레빈은 다소 소외된다. 하지만 브론스키에게마저 버림받는 안나가 파국으로 치닫는 사이, 농부들 사이에서 대안을 찾은 레빈은 사회 속에서 자신의 좌표를 찾는다.

결국 뮤지컬에서 안나의 비극이 부각된다. 안나의 삶을 끊임없이 어디론가 데려가는 기차의 기관사이자 극의 MC는 “신사숙녀 여러분, 규칙을 지켜주세요. 그렇지 않으면 신의 심판을 받는다”고 일갈한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안나로 인해 브론스키와 약혼이 파기된 비련의 주인공이자, 레빈과 사랑을 이루게 되는 키티는 안나를 용서한다.

능동적인 성격을 지닌 러시아 연출자 알리나 체비크의 적극적인 해석과 협력 연출·음악수퍼바이저로 참여한 박칼린이 조력자로 나선 안나 카레니나를 몇 가지 단점에도 지지하게 되는 이유다. 안나의 절규 속에서도 한 줄기 섬광이 스쳐간다. 북극에서 온 빙하가 녹는 소리였다.

옥주현이 정선아와 함께 안나 카레니나를 번갈아 연기한다. 정선아의 안나가 뜨겁다면, 옥주현의 안나는 신여성에 가깝다는 전언이다. 브론스키 역에는 이지훈과 민우혁이 캐스팅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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