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전반·변압기 등 중전기 ‘수급 불균형’ 정점
전선업계 자발적 구조조정 타산지석 삼아야

전선조합 산하 전선산업 발전위원회가 업계 현안에 대해 논의하고 있다.
전선조합 산하 전선산업 발전위원회가 업계 현안에 대해 논의하고 있다.

○…“예전엔 건설사 물량에 보통 5개 정도 업체가 참여했다. 하지만 지금은 10개 이상도 흔하다. 그만큼 경쟁구도가 심해졌고, 설령 부실업체가 입찰에 참여해도 건설사는 개의치 않는다. 기자재 납품업체가 부도가 나도 보증보험을 통해 완충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배전반 업체 A사 대표)

○…“최근 타워크레인이 넘어지는 사고가 괜히 빈번한 게 아니다. 현장의 크레인은 건설사가 크레인 대여 업체로부터 빌려서 쓴다. 싸다는 이유로 20년 넘은 노후 크레인을 쓰고 있는 게 근본적인 문제다. 자금난에 시달리는 건설사 입장에선 비록 품질은 떨어져도 저렴한 전력기기를 선호할 수밖에 없다.” (배전반 업체 B사 대표)

○…“우린 대출도 없고 자체 공장인데, 공장을 놀리면 한 달에 1억~1억 5000만원이 무조건 지출된다. 고정인건비만 8000만원이다. 대출도 많고 임대하는 곳에서 20% 떨어진 가격에 덤핑 수주하는 행태를 보면 놀라울 지경이다.” (배전반 업체 C사 대표)

○…“지난해 한전 배전용 변압기 단가입찰에 55개 업체(에너지밸리 입주기업 포함)가 뛰어들었다. 1000억원 시장에 50개가 넘는 기업이 참여하고 있다는 건 누가 봐도 과당경쟁이다. 올해도 최소 5개 정도가 추가로 에너지밸리에 변압기 공장을 지을 것으로 보인다.” (변압기 업체 D사 대표)

○…“기업들이 스스로 출혈경쟁을 멈출 수 없다면, 관련 단체가 적극 나서야 한다. 최소한의 적정 이익을 확보하는 방안을 고민해야 한다. 지금도 늦었지만 어쨌든 해야 한다.” (배전반 업체 E사 대표)

중소 배전반과 변압기 제조업계가 생사를 걱정해야 하는 기로에 섰다.

과당경쟁에 따른 출혈수주의 악순환 고리 속에서 시장 진입 기업들은 계속 늘어나는 반면 수요회복이나 새 먹거리 창출은 요원한 실정이다.

언제든 부도가 나도 이상하지 않은, 미래가 없는 사업으로 수렁에 빠지고 있다.

이 때문에 오로지 넘어지지 않기 위해 자전거 페달을 밟는 것처럼 저가수주를 반복하는 이른바 ‘폭탄 돌리기’식 영업과 수주가 대세가 된 지 오래다.

생계형 덤핑수주→마이너스 성장→자금난→금융권의 여신 회수 압박→덤핑수주 등으로 반복되는 악순환 고리에 휘말린 상당수 제조업체들은 언제든 도산에 직면할 수 있는 위태로운 살얼음판을 걷고 있는 셈이다.

◆배전반·변압기 공급과잉

국내 배전반 시장은 한전 GIS 시장을 제외하고 관수 4000억원, 민수 7000억원 등 연간 1조 1000억원 규모로 추정되고 있다. 문제는 제조업체 명함을 내밀고 있는 곳이 줄잡아 최소 500곳, 많게는 1000개 정도로 파악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중 제대로 된 사업장을 갖추고 사업을 하는 곳은 절반도 채 되지 않는다는 게 업계 안팎의 판단이다. 변변한 공장도 없이 물량을 수주하고 불법 하도급을 주는 경우도 적지 않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민수든 관수든 ‘제값’을 논하는 것은 일종의 사치처럼 여겨진다.

반대로 물량 수주는 마음먹기에 따라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얘기가 공공연히 떠돌고 있다.

실제로 민수시장에서 낙찰자와 2순위 업체 간 가격 격차가 20% 이상 벌어지는 경우는 허다하다.

한 업체 사장은 “민수 배전반 시장에선 일종의 도박성 수주가 일반화된 지 오래”라면서 “베팅을 크게 해야 이익을 낼 수 있다는 위험한 논리가 여전히 존재한다”고 꼬집었다.

이 때문인지 배전반 업계에선 내로라하는 업체들도 늘 ‘부도설’에 휘말리곤 한다.

실제로 지난해 업계 선두권 기업이 재무구조 개선 작업에 착수하는 등 업계의 전반적인 부실화가 현실화되고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한 업체 대표는 “2016년, 2017년 조달시장 규모는 모두 15%씩 감소했다. 민수시장 가격은 정상가격보다 20% 아래로 형성된 지 오래다. 이런 식이라면 사업을 계속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싶다”고 토로했다.

변압기 시장도 레드오션이긴 마찬가지다. 2012년까지 1000억원을 밑돌던 한전 배전용변압기 시장은 2013년부터 PCBs 함유 변압기 교체사업 등이 본격 확대되면서 급격히 늘어났다. 기다렸다는 듯이 진입 업체들도 급속도로 불어났다. 그러나 2~3년 반짝 호황이 끝나자 한전 변압기 구매물량은 다시 감소추세에 접어들었다.

그러나 업체들은 변화가 없다. 한전 변압기 입찰 유자격 업체는 2016년 36개 기업에서 불과 1년 만에 55개 기업으로 19개사나 늘었다. 올해는 벌써부터 지난해보다 더 늘어날 것이란 전망이 나오고 있다.

그나마 2016년과 2017년엔 조합 컨소시엄 체제가 유지됐지만 언제든지 중복투자, 공급 과잉의 후유증에 시달릴 수 있는 구조다. 민수시장은 이미 가격 질서 붕괴와 품질 하락 등 생산 과잉의 문제점들이 나타나고 있다.

◆전선업 자발적 구조조정 ‘보고 배워야’

브레이크 없는 과당경쟁 양상으로 치닫고 있는 중전기 시장은 전선업계의 자발적 구조조정을 타산지석으로 삼을 만하다.

전선업계는 2000년대 중반 이후 오랜 불황의 후유증인 공급과잉과 출혈경쟁, 불공정경쟁, 불법·불량제품 등을 타파하기 위해 자발적 구조조정을 통한 시장재편에 나서고 있다.

지난해 한국전선공업협동조합(이사장 김상복) 산하 ‘전선산업 발전위원회’를 발족하는 등 자발적 구조조정을 통해 위기 탈출의 단초를 마련했다.

발전위는 수년째 제자리걸음을 걷고 있는 구조조정 문제를 해결하고, 전선업의 미래를 그리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실제 기업들도 폐업과 인수합병(M&A), 조직·인력 구조 개편 등 이 같은 움직임에 적극 동참하고 있다.

경기도 안산 소재 전선업체 아이티씨(대표 명성식)는 강원도 춘천의 대한엠앤씨 공장을 매입하고 기존 공장을 매각하는 한편, 회사를 춘천으로 이전하면서 범용 케이블 생산 능력은 줄였다. 대신 고부가 제품인 고압 케이블 생산능력을 확대하는 등 구조조정을 추진하고 있다.

아이티씨는 ‘기업활력제고를 위한 특별법’(기활법) 대상으로 승인받아, 정부 지원을 받는 성과를 낳았다. 기활법은 공급과잉 업종 기업이 인수합병(M&A) 등 사업 재편을 쉽게 할 수 있도록 상법·세법·공정거래법 등의 관련 규제를 특별법으로 한 번에 풀어주는 법이다.

충북 음성의 서울전선은 업계 중견기업인 두원전선을 인수했다. 서울전선은 또 화성전선과 베트남에 공동으로 설립한 SH비나케이블을 전선소재 기업인 갑을메탈과 코스모링크 컨소시엄에 전격 매각하기도 했다.

대기업도 예외가 없다.

LS그룹 계열회사로 국내 중저압 케이블 시장 1위인 가온전선도 기활법의 사업재편계획 승인 업체가 됐다. 가온전선은 정부로부터 일부 소재사업을 정리하고, 신제품 개발과 상용화, 도체 생산성 향상 등을 추진하는 계획을 승인받았다.

가온전선은 초고순도 구리인 OFC(Oxygen Free Copper)의 생산을 중단하고, 같은 그룹 내의 LS전선에 사업을 이전할 계획이다.

최근 OFC 수요 감소로 시장 전반의 설비 가동률이 떨어지면서, LS전선과 가온전선으로 나뉘어 있던 OFC 사업을 LS전선으로 통합, 생산성을 높이는 한편 가온전선은 부가가치가 높은 사업에 집중하겠다는 구상이다.

씨엔아이도 산업용 저압선 생산능력을 줄이고 고부가 특수선을 새롭게 생산하는 내용을 골자로 기활법 사업재편 승인을 받았다. 이 회사는 솔레노이드 사업을 축소하는 대신, 옥내용 절연전선과 저압 전력 케이블로 전선 사업을 양분화하겠다는 구상이다.

대기업, 중소기업 가리지 않고 전선 제조기업들이 오랫동안 누적된 공급과잉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사업재편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모습은 치킨게임을 반복하고 있는 중전기 업계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중전기 업계 한 전문가는 “저가수주는 품질과 직결되고 불량 또는 저급 제품을 생산·유통하는 빌미가 되기 마련”이라며 “업계 스스로 자정 노력이 필요한데, 시장 참여자가 워낙 많다보니 제값 받기나 자발적인 구조조정 등을 바라기엔 한계가 많다”고 지적했다.

또 “과잉 경쟁 체제가 오랫동안 고착화된 만큼 지금이라도 관련 업계를 대표하는 단체들이 업종 전체의 부실화를 막기 위한 이성적인 논의를 서둘러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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