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도 어김없이 좋은 한국영화들이 관객을 찾았다. 올해도 1억명이 넘는 관객이 한국영화를 봤을 정도로 큰 사랑을 받았다.

송강호·황정민·이병헌·하정우·손예진·조진웅·김민희·곽도원·공유·마동석 등 베테랑 배우들의 활약은 여전했고, 김태리·김환희·조우진·박정민 등 자신의 얼굴을 관객에게 또렷이 남긴 새로운 배우들도 있었다. 나홍진·박찬욱·홍상수 감독 등 국내 최고 연출가들의 작품과 윤가은·이일형·장재현 등 신인 감독들의 약진도 돋보였다. 한 명의 배우, 한 편 영화가 모두 소중했다.

어떤 영화는 화려한 영상과 스펙터클로 관객의 환호와 박수를 끌어냈다. 또 어떤 영화는 한 편의 시가 돼 가슴을 쳤고, 음악이 돼 마음 속을 흘렀다. 긴 한숨과 함께 깊은 고민에 빠지게 하는 작품이 있었고, 가슴 속에 뜨거운 무언가와 함께 주먹을 꽉 쥐게 하고, 아름답고 또 아름다워서 눈물을 떨구게 한 작품도 있었다. 그렇게 한 편 한 편이 소중했다.

올해 개봉한 한국영화는 327편(영화진흥위원회 12월22일 기준)이다. 모두 소중하지만 이 중에서 8편을 추렸다. 미처 보지 못했다면 올해가 가기 전에 꼭 챙겨봐야 할 정도로 좋은 작품들이다.

◇'곡성'(감독 나홍진)

압도적이라는 말 외에는 달리 할 말이 없었다. 올해 '곡성'보다 더 강렬한 영화적 체험을 선사한 작품은 없었다. 이건 무지막지한 에너지로 관객의 혼을 빼는 미친 스릴러다. 관객을 당황스럽게 한 건 이 영화가 던진 화두였다. '곡성'은 결국 삶의 불가해함을, 인간의 심연을 들여다보는 영화였는데, 이 지점에서 나홍진 감독의 연출은 적중했다. 관객들은 이 영화를 본 뒤 그들이 경험한 것을 해석하는 데 온 힘을 쏟았다. 그러나 정답은 어디에도 없었다. 도무지 이 삶을 이해할 수 없기에 허망하게 서서 눈물 흘릴 수밖에 없는 그 모습, 그게 나 감독이 원한 것이었다. 나홍진 감독이 '황해' 이후 '곡성'을 내놓기까지 걸린 시간은 자그마치 6년. 나 감독이 차기작을 내놓는 데까지 또 6년이 걸린다고 해도 '곡성' 같은 영화라면 기다릴 수 있지 않을까.

◇'아가씨'(감독 박찬욱)

흡사 장인정신까지 느껴진다. 박찬욱 감독은 한 장면 한 장면을, 세공(細工)하듯 완성했다. 촬영은 우아하고, 미술은 아름답고, 편집에는 낭비가 없다. 박 감독의 영화를 보면 영화감독이 왜 예술가인지 알게 된다. '아가씨'는 예술이다. 이 레즈비언 로맨스는 '미친 사랑'('올드보이')도, '지독한 사랑'('박쥐')도 아니었다. 합당하고 정직한 사랑이었다. '아가씨' 전까지 박 감독 세계에 합당과 정직은 없었다. 대신 부조리가 가득 차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 영화에서 부조리에서 조리로 나아간다. "정치적으로 올바르다"(변영주 감독)라는 평가도 있었으니 이건 변화라면 변화다. 히데코(김민희)와 숙희(김태리)가 담을 넘어 자유와 사랑을 위해 달려가는 그 장면이 이 변화를 상징할지도 모른다. "내 인생을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 나의 타마코, 나의 숙희"라는 대사는 올해 가장 인상적인 대사였다.

◇'우리들'(감독 윤가은)

올해 가장 소중한 영화가 아닐까. 단순히 뛰어나서가 아니라 '우리들'이 그리는 관계들이 내 것이어서 애틋하고 애달프다. '우리들'을 향한 평단과 관객의 지지는 그런 감정이었을지도 모른다. 아이들이 주인공인 영화이지만, 아이들만을 위한 이야기는 아니다. '우리들'은 친구와 동료와 부모, 그 밖에 모든 사람과 관계 맺기가 서툴고 어려운 관객을 위한 영화다. 어려서 힘든 게 아니고 나이를 먹는다고 쉬워지지도 않는다. 매번 힘든 게 관계다. 윤가은 감독은 아이들을 세심하게 관찰한 뒤, 그 의미를 사려깊게 뽑아내 이야기를 확장한다. 잘못한 걸 알지만 용기가 없어서 망설이는 마음, 뭔가 꼬여버린 것 같은데 풀 방법을 몰라 이어폰을 꽂고 무작정 걷는 그 마음, 속상한 마음에 책상 앞에 앉아 잠 못 이루는 밤, 그 마음을 윤가은 감독은 안다.

◇'최악의 하루'(감독 김종관)

'최악의 하루'에는 생(生)의 감각이 살아있다. 김종관 감독은 사람을,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그들이 내뱉는 말들을, 그 모든 게 이뤄지는 공간들을, 관찰하고 탐구해 자기만의 언어로 풀어냈다. 억지로 지어낸 게 아니어서 시종일관 생생하다. 영화는 삶을 향한 재기발랄하면서도 쓸쓸한 찬가다. 주인공을 따라 다니며 서촌의 아름다운 풍경과 남산의 정취에 취한다. 킥킥대면서 하루를 보내고, 밤이 오면 당신도 함께 생각에 잠긴다. 영화는 괜찮다고, 자기비하는 그쯤에서 그만두자고 한다. 지나간 일은 모두 좋은 추억이 될 거라며 어설픈 조언과 위로를 건네는 영화가 아니다. '최악의 하루'는 나도 오늘 최악의 하루를 보냈다며, 우리 오늘 정말 안 풀리는 날이었다고, 서로에게 조용히 털어놓는 그런 영화다. 그래서 그 '해피엔딩'이라는 말이 유치하지 않게 들린다.

◇'당신 자신과 당신의 것'(감독 홍상수)

인간 홍상수의 삶에 풍파가 몰아쳐도 감독 홍상수의 영화 세계는 굳건하다('당신 자신과 당신의 것'은 그의 불륜설이 터지기 전에 만들어진 작품이다). 홍 감독이 놀라운 건 매년 한 작품씩 내놓을 정도로 왕성하게 활동하면서도 거의 매번 새로운 감각을 선사한다는 것이다. '당신 자신과 당신의 것'에서의 홍 감독은 우리가 이전에 본 적 없고, 상상도 못 했던 홍상수라서 놀랍다. "삶에서 중요한 건 사랑이야. 사랑뿐이라고. 다른 건 다 요식행위야! 사랑이 가장 중요해. 난 이제부터 그렇게 살 거야." 과거의 홍상수는, 이런 말을 해대는 남자들을 조소(嘲笑)하고 냉소(冷笑)했다. 그런데 홍상수는 지금, 이 말을 인정하고 받아들인다. 그는 서서히 변해왔지만, 이렇게 도약한 적은 없었다. 인간을 예리하게 벗겨내다가 따뜻하게 지켜보고, 이젠 감싸 안는다. 홍상수에게 어떤 변화가 생긴 걸까. 알 수 없다(사실 우리는 알고 있다). 하지만 확실한 건 그게 지금의 홍상수라는 거다.

◇'터널'(감독 김성훈)

한국 재난영화는 '터널'을 통해 일보 전진했다. '터널'에는 지난 수 년 간 재난영화라는 이름으로 나온 일련의 작품들이 보여준 클리셰가 거의 없다. 물론 온전히 독창적인 작품은 아니다. 그럼에도,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명확하고 장면마다 목표가 분명해 관습적이지 않다. 풍자와 해학의 힘을 보여준 영화이기도 했다. 어쩔 수 없이 2014년 4월의 일을 떠올리게 한다. 김성훈 감독은 '터널'을 통해 우리 사회의 병폐와 폐부를 여실히 드러내는데, '세월호 참사'의 트라우마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한 우리는 이 영화를 보며 웃어도 웃는 게 아닌 게 된다. 이 영화가 뛰어난 건 그러면서도 중심을 잃지 않으며, 전혀 감상적이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이다. '터널'은 김 감독의 전작인 '끝까지 간다'보다 더 뛰어난 작품이다. 하정우는 이런 류의 연기에서 최고다.

◇'밀정'(감독 김지운)

무엇을 볼 수 있느냐, 그 자체가 재능일 수 있다. 김지운 감독은 일제 강점기에서 다른 창작자들이 보지 않을 걸 봤고, 영화로 만들었다. 그건 '흔들리는 마음'이다. 김 감독은 이 시대를 애국과 반역의 이분법이 아닌, 사람이라서 나약한, 사람이라서 흔들리는 한 남자로 눈빛으로 표현한다. '밀정'을 정교한 스파이물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이 영화가 다루는 사건 자체가 그리 치밀한 각본에 의해 연출되지 않았다. 평면적이어서 재미없는 캐릭터도 있고, 도구적으로 쓰이고 마는 인물도 있다. 몇몇 장면은 튄다. 하지만 이 영화가 가고자 했던 길과 도달한 지점에 대해서는 높게 평가해야 한다. 그는 깊게 갔다. 그가 스파이물에서 이토록 인간적인 인간을 그려낼 줄은 몰랐다. 그리고 그건 송강호라는 대배우의 능력이기도 하다.

◇'부산행'(감독 연상호)

연상호 감독은 실사영화 데뷔작을 통해 한국 장르영화 영역을 확장했다. 좀비는 더이상 생소한 소재가 아니다. '부산행'은 연 감독의 애니메이션 '돼지의 왕'(2011) '사이비'(2013)보다 뛰어난 작품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충분히 소중하다. 연 감독은 두 가지 우려를 완전히 날렸다. 애니메이션만 해온 연출가가 실사 영화에서도 그 실력을 발휘할 수 있을지, 사회적 메시지가 진득하게 달라붙은 작품들을 만들어온 창작자가 오락영화 연출도 가능할지, 연 감독은 둘 모두를 해냈다. 그가 가진 이야기꾼으로서 재능은 단순히 흥미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낼 줄 안다는 것에 국한하지 않는다. 좋은 창작자는 뻔한 것도 뻔하지 않아 보이게 만들 줄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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