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규/방송작가
이용규/방송작가

엊그제 이웃 농부로부터 얻은 볏단을 이용해 아침부터 이엉을 엮는다. 새로 심은 감나무에 입혀 줄 옷을 만드는 중이다. 한 줌 한 줌 손아귀에 전해지는 볏짚의 부드럽고 따뜻한 기온이 마음에 전해진다. 얼마나 오랜만인가. 이런 볏짚의 감촉을 느껴보는 것이.

40년 가까이 됐지만 지금도 눈과 귀에 쟁쟁하다. 요즘 같은 가을이면 아버진 늘 마당 귀퉁이에 앉아 종일 이엉을 엮으셨다. 본체와 돼지우리, 헛간 등 모두 세 채의 초가를 새로 올려야만 했기에 그만큼 이엉이 많이 필요하셨던 것이다. 아버지가 이엉을 엮으실 때면 종종 산처럼 쌓인 볏단 위에 올라가 뒹굴며 한나절을 보내곤 했다. 그 따사롭고 부드러우며 촉촉한 감촉, 마치 땅으로부터 전해오는 듯 야릇한 곡식 냄새를 맡을 때면 나도 모르게 뭔가 보호받고 있다는 행복함을 느끼곤 했다.

누군가를 보호한다는 것의 의미를 이제 조금은 알 것 같다. 아버지가 초가를 올려 우리들을 긴 겨울로부터 보호했듯이 어느새 나도 성장하여 누군가를 보호할 나이가 되었다. 비록 아버지의 시절처럼 초가도 없고 자식들도 많지 않지만 어디 보호할 것이 한두 가지인가.

정성스럽게 엮은 이엉으로 마침내 감나무를 감싼다. 마음이 급해 어린 녀석 대신 큼지막한 녀석을 데려다 놨더니 얼마나 홍역을 앓았는지 겨우 두어 개의 열매로 올 가을을 마중할 모양이다. 하지만 이 녀석을 볼 때마다 마침내 내 집을 가진 것 같은 행복함에 젖을 때가 많다.

우리나라 사람들치고 감나무를 모르는 사람을 없을 것이다. 그만큼 흔한 나무였고, 많은 것을 내준 나무였다. 그래서 가을 날 붉고 튼실하게 열매를 달고 있는 감나무를 볼 때마다 왠지 고향에 와 있는 듯 착각을 느끼게 되는 것일까. 감나무가 있는 마을은 그래서 어디든 고향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일까.

이런 인연으로 언젠가 감나무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만들어본 적이 있다. <감나무, 자서전을 쓰다>라는 다큐멘터리로 기억한다. 우리는 가장 크고, 가장 나이 많은 감나무를 찾기 위해 전국 방방곡곡을 수소문했다. 그렇게 발견한 감나무가 경남 의령군 백곡리에 있는 감나무였고, 감나무의 내력 하나하나를 추적하기 시작했다.

백곡리의 감나무는 우선 외양부터 우리를 압도했다. 전문가들에게 의뢰한 결과 수령이 4백년이 넘었으며 줄기의 둘레는 어른 다섯 사람이 팔을 벌려야 감쌀 수 있는 굵기였다. 그러나 더 마음을 끈 건 이런 부피와 나이보다 그 감나무 줄기 곳곳에 쌓인 기억이었다. 지금도 마을 공회당처럼 사용되고 있는 감나무의 그늘은 그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휴식을 제공했고, 얼마나 많은 꽃과 열매를 매달아 아이들을 유혹했으며, 고샅의 슬픔과 이별을 얼마나 많이 바라봤던 것일까.

그래서 우리는 감나무에게 많은 것들을 물었고, 감나무는 천천히 답했다. 감나무가 쓰는 자서전을 만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우린 알았다. 감나무가 단순한 과실나무가 아닌 이 땅 어머니들의 삶과 너무도 닮아있다는 것을.

본디 열매를 맺는 감나무는 씨앗에서 나오지 않는다. 감나무는 반드시 고욤나무 뿌리에 접을 붙여야 열매를 맺을 수 있으며, 밤별처럼 많은 꽃을 피우지만 꽃들마다 열매를 매달지는 않는다. 또 열매를 매달았다고 해도 가을까지 온전히 품고 가지 않는다. 결국 고욤나무에 시집을 오고, 잠시 찬란한 행복을 맛보지만 수많은 자식을 품고 긴 여름을 보내야만 하는 운명을 타고난 것이다.

그런 고생 끝에 열매를 맺었지만 결국은 하나도 남김없이 모두 사람이나 새들에게 내주고 만다. 그리하여 홀로 긴 겨울을 보내야 하는 운명인 것이다. 이 또한 어머니와 닮아있으며 더 놀라운 것은 감나무 줄기 속에 있다. 오랜 세월을 견딘 감나무의 속을 갈라보며 어김없이 까만 먹물이 들어있다. 이를 흔히 먹감나무라 부르지만 기실 이것이야말로 평생 자식을 키우기 위해 애 쓴 어머니들의 가슴 속이 아니겠는가. 속이 타서 까맣게 변해버린 고단했던 일생의 흔적이 아니겠는가.

감나무는 사람의 발자국 소리를 들으며 자란다고 했다. 그만큼 사람과 가까운 나무였으며 사람에게 이로운 나무였다. 밭 귀퉁이 마당 한 쪽, 뒤란의 돌담 사이에 아무렇게나 서 있지만 어떤 불평도 없이 매년 튼실하게 열매를 매달아 주던 나무.

그 감나무를 정성스럽게 이엉으로 감싼 다음, 안에 넉넉하게 퇴비를 넣어주기로 한다. 제발 얼지 않고 꿋꿋하게 긴 겨울을 견뎌주기를 바라면서. 아무래도 어머니에게 안부전화라도 한 통 드려야겠다. 어느새 우리 집 마당에 단정하게 서 있는 감나무가 그렇게 나에게 말하는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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