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종호 ㈜터칭마이크 대표이사
오종호 ㈜터칭마이크 대표이사

가을비가 추적이는 밤을 달려 남쪽으로 내려갔다. 4시간 12분이 걸린다고 스마트폰 내비게이션 어플은 말했다. 휴게소에 들러 한 두 번의 휴식을 취해도 5시간 정도면 넉넉히 닿을 수 있는 거리였다. 숙소에 도착해서 씻고 잠시 뒹굴어도 6시간 이상의 단잠이 확보되어 있음에 안도하며 다음날 강의가 있는 창원으로 차를 몰았다. 같은 장소에서 다른 강의가 잡혀 있는 절친한 선배 강사가 동행했다.

어두운 중부내륙고속도로에서 대형 트럭들이 줄지어 달음박질치고 있었고, 비가 이따금씩 찾아와 차창을 두드렸다. 사위는 적막했고 깊어가는 밤은 평화로웠다. 빗물에 젖어 검어졌지만 여전히 거칠한 도로의 살갗 위를 바퀴들은 날렵하게 더듬으며 미끄러졌다. 간밤에 숙면을 취하지 못한 탓에 미리 준비한 각성음료를 조금씩 홀짝거리며, 지지고 볶는 일상사의 애처로움과 손에 잡히지 않는 바람 같은 자유로움에 대해 우리는 이야기했다. 이야기 속에서 삶은 늘 돈이었고, 다름을 인정하지만 인정하는 것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사람과의 관계였다. 우리는 가끔 씁쓸했고 농담을 하며 때로 웃었다. 일 방향 도로 위에서 시간은 빠르게 뒤로 물러났고, 시간과 시간 사이를 채우기 위해 시커먼 공간은 촘촘히 줄지어 달려들었다. 빗방울이 간혹 목청을 높이며 졸음을 대신 쫓아냈다.

문경새재의 한 터널을 중간 정도 지날 무렵, 귀에 거슬리는 소리가 차 안을 파고들었다. 타이어에 문제가 생겼음을 직감했다. 다행히 뒤따라오는 차가 없어 비상등을 켜고 느린 속도로 터널을 빠져나갔다. 터널 밖 곡선 길에 고장 난 대형 트럭 한 대가 눈을 깜빡이며 서 있었다. 갓길이 비좁아 트럭의 존재는 큰 안도감을 주었다. 트럭 앞쪽에 차를 세웠다. 예상대로 오른쪽 뒤 타이어가 터져 있었다. 굉음을 쏟아부으며 지나가는 화물차들을 피해 차 밖으로 나와 서둘러 보험사에 긴급출동을 요청했다. 위치 파악에 한 차례 혼선을 빚어 출동차량이 바뀌는 우여곡절을 겪으며 스페어타이어로 교체를 마치는데 걸린 시간은 두 시간, 갈 길은 아직 240km 넘게 남아 있었지만 시속 80km를 초과하여 운전할 수 없는 탓에 도착 시간은 한없이 늘어져 있었다. 휴게소에서 예상치 못한 추위로 얼어붙은 몸을 녹이고 허기를 달래는데 소요될 시간은 덤이었다.

창원 시내에 도착해 따뜻한 물로 몸을 풀고 눈을 붙인 시간은 단 한 시간. 오전 10시부터 진행할 강의는 오후 4시 50분까지 예정되어 있었다. 점심시간을 활용해 차의 수리를 맡겼다. 다행히 졸음은 강의가 끝나고서야 눈꺼풀에 내렸다. 빗속을 뚫고 부산에서 달려온 반가운 선배와 해후했다. 다시 밤길을 거슬러가야 하는 탓에 고기 안주에 맥주 한 병을 소중히 나누어 마시며 우리는 전날의 일과 삶을 이야기했다.

경험은 나이에 비례하지 않는다. 나이를 빙자해 경험적 지혜를 떠드는 것은 위험하다. 우리의 경험은 시간 · 공간 · 인간의 틀 속에 갇혀 있다. 절체절명의 위기상황 속에서 이전과 전혀 다른 시공은 우리를 압도하고, 과거의 지식과 지혜는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한다. 위급 상황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과 직관뿐이다. 서로 다른 시공은 사람들 간의 공감을 제약한다. 문제해결을 위한 판단은 동일한 시공에 존재하는 사람들끼리 하는 것이 우선이다. 때로는 혼자 그것을 감당해야 한다.

우리는 아는 것이 많지 않음을 인정하고 겸손해야 한다. 해 봐서 안다고 말하는 오만이, 스스로의 직관에 따르라고 가르치지 못한 어리석음이 불러온 재앙과 슬픔을 우리는 알고 있다.

돌아오는 길 내내 폭우가 쏟아졌다. 밀려드는 피로에 선배는 깊이 잠들었다. 그의 얼굴이 편안해 보였다. 자율주행이 일상화된 미래에는 함께 쉴 수 있을 터이지만 아직 누군가는 운전대를 잡아야 했다. 기계가 많은 것을 대신해 줄 세상에서도 삶의 운전은 여전히 우리 자신의 몫이다. 대신, 삶에 정해진 도로와 목적지는 없다. 마음껏 달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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